<colbgcolor=#000><colcolor=#fff> 에드먼드 켐퍼 Edmund Kem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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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먼드 에밀 켐퍼 3세 Edmund Emil Kemper III |
이명 |
남녀공학 살인마 The Co-ed Killer |
출생 | 1948년 12월 8일 ([age(1948-12-08)]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뱅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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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206cm, 113kg |
IQ | 145 ( 웩슬러 지능검사) |
범죄 정보 | |
유형 | 살인 (존속살해 및 연쇄살인) |
사상자 | 10명 |
상세범행 |
2명의 조부모 살해 (미성년자 시절) 8명 연쇄살인 및 시간 (친모 포함) |
범행기간 | 1964년 ~ 1973년 |
체포 | 1973년 6월 24일 |
처벌 | 종신형 7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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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냥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어요.
왜 친할머니를 죽였느냐는 물음에 대한 에드먼드 켐퍼(당시 15세)의 대답
왜 친할머니를 죽였느냐는 물음에 대한 에드먼드 켐퍼(당시 15세)의 대답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를 보면 1분도 안 돼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 여자애랑 사귀고싶다'. 그다음엔 바로 이런 생각이 들죠. "꼬챙이에 꽂혀 있는 그녀의 머리통은 어떤 모습일까?"[1]
미국의 연쇄살인범으로, 1970년대 초 캘리포니아 산타 크루즈 지역에서 활동하며 여섯 명의 젊은 여성들을 살해 후 시간했다. 주로 대학가 근처에서 여대생들을 살해하여 남녀공학 살인마(The Co-ed Killer)로도 불린다. 또한 그와 안면이 없었던 젊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그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그리고 친어머니 또한 그에게 살해당했다. 켐퍼는 2m를 넘는 거대한 신장과 높은 지능지수[2]로 인해 유명해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에드먼드 에밀 켐퍼 3세는 1948년 12월 18일,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시의 성 조셉 병원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 에드먼드 에밀 켐퍼 주니어는 29세, 어머니 클라넬 엘리자베스 켐퍼는 27세였다.켐퍼의 부모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늘 서로를 비난하기에 바빴다. 결국 그들은 그가 아홉 살이 되던 1957년 이혼했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아버지를 좋아했던 켐퍼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했으나, 결국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여자형제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평생 자기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모의 큰 키를 물려받은 켐퍼는 15세에 이미 193cm에 달했는데, 이는 그의 특이한 행동과 맞물려 주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위압감을 주었다. 그런 켐퍼가 누나나 여동생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켐퍼의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되던 해에 그의 방을 지하실로 옮기고 밤에는 그의 방 문을 밖에서 잠가 버리기도 했다.
켐퍼의 어머니인 클라넬은 알콜 중독자로, 자신의 세 명의 자식들에게 술주정과 폭언을 일삼았다. 켐퍼의 누나와 여동생은 일찌감치 결혼해 독립한 뒤 그녀와 의절해 버렸다. 켐퍼의 주장에 의하면, 그녀는 그의 외모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거나 비웃었다. 그녀는 그의 지나치게 큰 키를 조롱하며, 어떤 여자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문에 켐퍼는 어머니와 늘 언쟁을 벌였고, 이런 심한 말싸움은 먼 훗날 켐퍼가 어머니를 살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로파일러들은 켐퍼의 최종 목표가 처음부터 그의 어머니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
어린 시절 켐퍼는 영특했으나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켐퍼는 자존감이 낮았고 수줍음을 잘 타는데다 사교성이 떨어졌는데, 이는 그가 큰 키에도 불구하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는 데에 일조했다. 가정에서의 학대와 학교에서의 고립은 켐퍼의 정서 불안을 심화시켰다. 그는 또래들이 하는 일반적인 놀이 대신에, 동생과 가스실이나 전기 의자를 통해 죽어가는 흉내를 내는 등의 놀이를 하며 즐거워했다.
한 번은 남자아이들이 켐퍼가 좋아하는 학교 선생에게 키스해 보라고 놀려대곤 했는데, 나중에 누나에게 자신이 그녀에게 키스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해 그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나쁜 가정사와 어머니의 학대로 인해 인성이 막장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성에 대해 비정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자주 극도로 폭력적인 몽상에 빠져 있었으나 상담교사를 비롯한 선생들은 그가 조부모를 살해할 때까지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2.2. 조부모 살인
소년 시절의 에드먼드 켐퍼.
1962년, 더 이상 어머니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판단한 켐퍼는 아버지가 있는 로스 앤젤레스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켐퍼의 아버지는 갑자기 찾아온 그를 반기지 않았고, 그에게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켐퍼의 어머니가 그를 맡기를 거부했고,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켐퍼는 새로운 가정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새어머니는 벌써부터 평균적인 성인 남성 이상의 체격을 가진 그를 껄끄러워했고, 아버지는 그런 그를 통제하길 어려워했다. 결국 1963년, 켐퍼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를 핑계삼아 방문한 자신의 부모 댁에 켐퍼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부모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아 조부모의 집에서 살게 된 켐퍼는 분노에 차 있는 상태였고, 자연히 조부모와도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켐퍼는 할아버지를 노망 난 인간으로, 할머니를 잔소리가 심한 통제광으로 여겼다. 조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가던 켐퍼는 그들이 키우던 개를 밟아 죽였으며, 라이플로 새나 토끼 같은 소동물을 쏴죽이곤 했다. 켐퍼의 할머니는 그런 켐퍼를 혼내는 한편으로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해, 손가방 속에 권총을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를 알고 있던 켐퍼는 ‘할머니가 곧 은행을 털 것’이라는 농담을 하면서도, 할머니조차 자신을 위험한 인간으로 여겨 믿지 못하는 데에 커다란 불만을 품었다.
1964년 8월 27일, 여느 때처럼 사냥을 하려고 총을 챙기며 집을 나가려던 켐퍼와, 새를 쏘지 말라는 그의 할머니 사이에 가벼운 말다툼이 일어났다. 대화를 마치고 자신에게서 등을 돌려 멀리 걸어가는 할머니를, 켐퍼는 들고 있던 총으로 쏘았다. 켐퍼는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부엌칼로 세 번 찔러 살해했다. 이윽고 장을 보러 외출했던 할아버지가 돌아오자, 켐퍼는 그 또한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 켐퍼는 조부모의 시신을 차고에 숨긴 후, 겁에 질린 채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권한대로 경찰에 범행 사실을 고백하며 자수했다.
2.3. 아타스카데로 수용 생활
체포된 켐퍼는 캘리포니아 소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몇 가지 검사가 시행되었고, 그의 IQ가 145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재판에서 할머니를 왜 죽였냐는 물음에 단순히 할머니를 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고 답했다. 판사는 켐퍼가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를 아타스카데로 주립병원[4]에 수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그러나 아타스카데로에서의 경험은 켐퍼를 갱생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반사회적 성향과 폭력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타스카데로에 수감되어 있었던 수많은 강간범들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학적인 성적 환상을 키웠고 그들의 범행수법과 사후대처를 전수[5]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아타스카데로의 의사들은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이는 켐퍼가 영리했고 겉으로는 모범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의사들과 병원 직원들이 켐퍼를 신뢰했고, 그가 정신병 감별 진단 기구들을 볼 수 있게 내버려 두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에게 다른 죄수들의 진단을 감별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 머리가 비상했던 켐퍼는 총 28가지의 진단 기구를 모두 외워 의사를 속여넘겼으며 정신병이 치료되었다는 소견을 받고 정신병원에서 나오게 된다.
2.4. 출소 이후
켐퍼는 1969년 12월 18일, 자신의 21번째 생일날에 가석방되어 세상에 나왔다. 이때 전과는 말소되었으나 문제는 그에게 살 집이 없었던 것이다. 선택이라고는 켐퍼가 싫어하는 어머니와 사는 것인데 아타스카데로의 의사들은 그가 어머니와 또다시 함께 있게 된다면 양쪽 모두에게 독이 될 뿐이라며, 켐퍼에게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켐퍼는 집을 구할 돈이 없다보니 본인도 싫었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결국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로 어머니와 약속하며 함께 살게 되었다.출소 이후 켐퍼는 경찰 보조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너무 큰 키와 체중(206cm, 113kg)때문에 거부되었다.[6] 하지만 많은 경찰관을 만나 경찰관들과 친하게 지냈다. 어머니 클라넬은 3번째 이혼 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사무보조 자리를 얻었는데, 이때 켐퍼도 그 대학의 커뮤니티 칼리지에 잠깐동안 참여했다. 켐퍼는 여기서 교통과 일자리를 얻어서 성실히 일하며 이때까지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타고 일하던 중 맞은편 트럭에 의한 교통사고를 당해 왼팔을 다치고 만다. 1970년대 그 당시 물가로 15,000달러라는 꽤 큰 보상금을[7] 받았지만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게다가 집에 머물던 켐퍼는 어머니의 알콜중독과 폭언으로[8] 인한 불화가 심했고 술에 취해 돌아온 어머니의 폭언을 듣고는 분노가 폭발해 자신이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살인을 저지르고자 범행을 계획하고 실현한다.
2.5. 연쇄 살인
범행을 결심한 켐퍼가 차를 몰고 산타크루스의 산악지대로 향한 1972년 9월부터 그의 엽기적인 살인이 시작되었다.그는 총과 칼을 준비해서 5명의 대학생과 1명의 중학생을 납치해 죽였다.[9] 그는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낸 뒤 시체를 상대로 각종 성교를 하고 머리를 절단했다. 머리카락과 피부, 치아를 보관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켐퍼의 마지막 피해자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 사라였다. 그는 장도리와 칼을 들고 어머니의 침실을 찾아가 자고 있던 어머니의 머리를 장도리로 내리치고 칼로 목을 그어 살해한 후 시체를 강간하고 머리를 자른 후 입에 쓰레기들을 채워 넣었다. 켐퍼는 어머니의 잘린 머리에 다트를 던지며 즐거워하고, 성대를 떼어 믹서기에 갈고,[10] 잘린 머리에 펠라티오를 하는 등 끔찍하고 잔인한 행위를 이어갔다. 켐퍼는 어머니의 사체를 디스포저에 쑤셔넣은 후 통째로 갈아버리려 했지만 기계가 잘 작동하지 않아 미수에 그쳤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친구 사라까지 불러내서 살해했다.
끔찍한 살인들이 발생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경찰은 켐퍼를 의심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켐퍼가 당시 일반적인 살인사건에서 용의자보다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시체들을 처리하며 단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수사를 난항에 빠뜨렸으며, 아예 용의선상에 올라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켐퍼는 경찰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수했다.
2.6. 체포 후
처음 전화신고에서 경찰은 그저 그가 장난치는 걸로 생각해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에 켐퍼는 참을성 있게 과거 경찰관 일을 알아보던 중 친해진 산타크루즈 경찰서 경관의 개인번호로 전화해 자신이 연쇄살인범이며 어떤 방식으로 여자들을 죽이고 시간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때문에 놀란 경찰에서 자수한 켐퍼를 정식으로 체포하게 되었고 수사를 하면서 그의 범행에 경악한다. 특히 이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큰 충격을 받게 했다. 체포된 켐퍼는 감옥에서 자살을 2번이나 기도했으나 모두 교도관의 제지로 실패했다.
법정에 선 켐퍼는 자신의 범죄행각을 모두 진술하였다. 이때 판사가 켐퍼에게 어떤 처벌을 받고 싶냐고 물어보자 켐퍼는 사형을 요구하며 '고문해서 죽여달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켐퍼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23년 기준으로 캘리포니아 주립 의료 시설 교도소에서 여전히 복역중이다. 본인의 진술에 의하면 교도소 생활에 나름 만족하고 있으며 교도소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주립 의료시설에서 켐퍼는 같은 시기 13명의 연쇄살인을 일으켰던 하버트 멀린[11]과 충돌했는데 켐퍼는 멀린을 그냥 냉혈한 연쇄살인범이라고 경멸했다.[12] 켐퍼는 멀린이 TV를 보는 다른 수감자를 보면 노래를 부르고 괴롭히는 버릇이 있어서 물을 뿌리고 닥치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이후 멀린의 행동이 좋아지면 땅콩을 줬다고 한다. 이를 '행동수정치료'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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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상. 끔찍한 범죄를 수차례 저지른 흉악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켐퍼는 교도소에서 정신과 의사와 다른 죄수들의 약속을 잡는 일을 담당했으며 도자기 컵을 만드는 유능한 장인이었다. 또 교도소 프로그램의 조정자였고 블라인드 오디오북을 수백권 이상 5,000시간 가량 녹음했으며 2015년 뇌졸중 판정을 받아 쓰러질때까지 이 일을 했다고 한다. 여러편의 TV 인터뷰에도 나왔고 FBI와의 인터뷰, 연쇄살인범들의 행동연구에도 적극 협조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FBI 프로파일러인 존 더글라스는 켐퍼를 자신이 인터뷰한 재소자 중에 가장 똑똑한 인물이며 폭력적인 범죄자에 대한 보기드문 통찰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범수인터라 1979년, 1991년, 2002년, 2007년, 2012년, 2017년에 가석방 될 기회를 얻었지만 본인이 모두 거절했다.[13]
2021년의 모습. 세월이 오래 지난데다 특유의 콧수염도 없어서 그런지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2024년 최근의 모습.
3. 대중매체
미드 마인드헌터 시즌 1 2화에 등장한다. 계속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주인공 일행이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한 주요 범죄자로 나와 꾸준히 언급된다.
[1]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이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에드 게인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에드먼드 켐퍼가 한 말이다. 더불어 범죄 사건을 다루는 각종 한국 프로그램에서도
테드 번디가 한 말이라고 소개하는, 잘못된 내용을 그대로 방송하기도 했다.
지구에 무슨 129,
풀어 파일러
[2]
법원의 임상심리사와 진행한
웩슬러 지능검사에서 145를 기록한 것은 연쇄살인마라는 이슈를 떼어놓고 봐도 높은 지능이며, 이는 상위 0.13%에 속한다.
[3]
"켐퍼가 끔찍한 살인 행각을 저지른 것은 한없이 증오하는 어머니에게 보복하려는 예행 연습에 지나지 않았다." - 존 더글러스, <마인드 헌터> 중에서.
[4]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병원. 정신이상 판정을 받은 범죄자들을 수용한다.
[5]
예를 들자면 "여자를 강간했다면 훗날 경찰에게 신고하지 못하게 아예 죽여버리는 것이 안전하다." 실제로 잡범에 불과했던 초범이 수용소 등에서 다른 범죄자들에게 이것저것 배워 진짜 흉악범으로 변모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마약이나 도박 등 치료가 필요한 초범들마저 걸리지 않는 비법 등을 사사하고 아예 중독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전문가들이 죄질에 따라 수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것이 이것 때문.
[6]
이건 적당히 돌려말한 것일 가능성이 크고, 실제로는 내부기록에 존속살인 이력이 남아있어서 거부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7]
현재의 가치로 9만 달러, 한화로 약 1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8]
켐퍼가 집에 있는것과 전과를 들추어냈다. 이때문에 켐퍼는 어머니를 살해한 것을 경찰이 추궁했을때 "수십년 동안 나한테 불평을 늘어놓고 고함을 지르고 명령을 해댔으니 그렇게 당해도 싸죠"라고 답변했다.
[9]
이 중학생이 아이코 구(Aiko Koo)라는 한국계 미국인 소녀였다. 1957년생으로 당시 15살이었다. 한국 전통 무용을 전공했고 사건 당일도 무용 수업을 끝마치고 집에 가려다 버스를 놓쳐 기다리던 중 참변을 당했다. 참고로 한미 혼혈로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라트비아계 미국인이다.
[10]
특히 성대를 심하게 훼손한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모욕을 퍼부은 것에 대한 분노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11]
2022년 8월 18일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12]
특히 멀린은 가석방 심사 대상에서 8번이나 탈락했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그를 소개하는 위키에서도 멀린은 가석방 될 가능성이 없었다고 할 정도다.
[13]
여기서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석방을 선택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심사 대상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켐퍼는 어차피 심사과정에서 탈락할 게 뻔하다고 본인이 심사 받기를 거절했다. 사실 켐퍼같은 무기수들은 이미 교도소에서 오래 살아왔고 사회로 나가면 어차피 적응을 못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모범수로 가석방이 될 수 있어도 일부러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