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엄치인(嚴致仁) |
생몰 | 1894년 9월 10일 ~ 1921년 12월 5일 |
출생지 |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덕흥리 |
사망지 | 함경남도 고원군 |
위패 | 국립서울현충원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엄치인은 1894년 9월 10일 함경남도 고원군 하발면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 1919년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이 전국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관흥 등 기독교 인사들을 비롯하여 천도교 인사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그들은 거사일을 3월 19일로 정하고 거사 장소는 읍내 하시장으로 정했다. 이들은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는 한편 하고읍리 소나무 숲에서 미농지로 태극기 3백여 매를 제작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이윽고 거사일은 3월 19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하시장에서 5백명의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석연리 덕지장으로 향했고, 덕지장에서 기독교도 1백여 명이 가세하면서 시위는 더욱 가열되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총칼 앞에 시위대가 해산되었고, 엄치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4월 18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문의 여독으로 1921년 12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엄치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