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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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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니 맥의 필라델피아 시절2. 아놀드 존슨의 어두웠던 캔자스시티 시절3. 찰리 핀리와 1970년대의 영광4. 월터 A. 하스와 1980년대의 영광5. 빌리 빈의 머니볼 시대6. 2006년의 성공과 추락7. 2012년~2015년 : 머니볼 시즌 28. 2016년~2017년 : 다시 리빌딩 모드로9. 2018년~2021년10. 2022년~ : 라스베이거스로 떠나기 전 숨고르기

1. 코니 맥의 필라델피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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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보스턴 브레이브스 vs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월드시리즈 기념 경기 기록부
1910, 1911, 1913년 월드시리즈 우승한 어른 코끼리가 1914년 아기 코끼리를 응원해주지만, 0승 4패로 졌다.

1901년 아메리칸 리그의 창립과 동시에 리그에 참가한 에이스는 내셔널 리그에서 포수 겸 감독을 지낸적이 있는 코니 맥을 구단 공동 소유주 겸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역사가 시작된다. 1914년까지는 6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는 강팀이었다.[1] 그러나 이후 긴축 재정 때문에 전력이 약해지면서 꼴찌로 추락하는 비운을 맛본다. 하지만 1925년부터 다시 상승세를 타서 1929년부터 1931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우승 및 1929과 1930년, 다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주축으로 활약한 것이 레프티 그로브 지미 폭스, 알 시몬스이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구단주이자 감독인 코니 맥의 재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다시 긴축 재정으로 돌입했기 때문에 레프티 그로브 및 지미 폭스와 같은 우수한 선수들을 팔아치우며 몰락했고, 코니 맥 시대에는 다시 우승을 하는 일이 없었다.

필라델피아 시절은 그냥 코니 맥의 시대라고 봐도 된다. 팀의 창단과 동시에 공동 구단주 겸 단장 겸 감독이었으며 감독은 그의 나이 87세까지 맡으며 무려 50년간 역임했고, 1936년부터 1954년까지는 단독 구단주였다. 구단주를 겸하고 있었기에 조금 눈에 난 선수나 연봉 많이 받는 선수는 그냥 다른 팀으로 보내버린 적도 있었다. 짠돌이 구단의 전통은 필라델피아 시절부터 앞에서 언급한 대공황기의 대규모 방출도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강타자였던 지미 팍스는 술을 좋아하던 사생활을 이유로 쫓겨났다.

2. 아놀드 존슨의 어두웠던 캔자스시티 시절

결국 코니 맥 가문은 재정난 때문에 구단을 시카고 출신의 사업가인 아놀드 존슨에게 매각한다. 새 구단주인 존슨은 팀이 성적 부진에다 관중 동원도 되지 않았기에 바로 1955년에 캔자스시티로 연고를 이전한다. 연고 이전한 해에는 130만이 넘는 관중을 동원했지만 이겨야 관중이 오지(...) 결국에 캔자스시티에서 마지막 4년은 리그에서 팀 성적이 10-7-10-10으로 하위권에서 전전했고, 관중 동원도 9-9-10-9를 찍었다. 캔자스시티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한건 연고 이전한 해인 1955년의 6위. 게다가 존슨은 선수를 키울만하면 선수를 팔아넘기고, 해당 구단의 퇴물 선수 몇 명 받아오는 막장 운영을 해댔는데, 에이스 농장을 가장 많이 이용했던 것은 다름아닌 뉴욕 양키스였다. 로저 매리스를 필두로, 퇴물이 됐던 에노스 슬로터를 에이스가 겨우 살려 놓으니 도로 가져가버리곤 했다. 양키스에서 망한 유망주였던 밥 서브의 경우에는 에이스가 살려놓으니, 양키스로 도로 데려가버리고는 또다시 망한 사례. 그런 말도 안 되는 트레이드한 뒤에는 돈 라슨 같은 퇴물만 받아오니 성적이 유지될 수가 없었다. 결국 캔자스시티에서는 단 한 번도 5할 승률조차 넘긴 해가 없었다. 필라델피아 막바지 시절인 1953년부터 캔자스에서의 마지막 해인 1967년까지 무려 15년 연속으로 5할 미만 승률을 기록하였다.

6년 동안 이 구단을 소유하고 있던 존슨은 결국 60년에 구단을 찰리 핀리에게 매각하였다. 핀리는 팀을 살리기 위해 칙칙한 유니폼을 1963년에 노란색으로 바꿨고 1968년에는 오클랜드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참고로 1932년부터 1970년까지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39년 연속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동률이며, 그 위에는 각각 40년(1955~1994)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41년(1903~1943)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밖에 없다.어라? 누가보면 출생~사망인줄 알겠다?

3. 찰리 핀리와 1970년대의 영광

팀을 살리기 위해 핀리는 갖은 노력을 하였고, 인기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녹색 유니폼이 바로 이 때 생겼다. 그 전까지는 단순히 검정, 회색, 하얀색 밖에 유니폼에 없었는데 노란색, 녹색 등의 원색 유니폼을 통해 이미지를 참신하게 바꿨다. 또한 공격적인 야구를 위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지명타자제를 제안하여 1973년부터 실시되어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차별점을 두었다.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스트라이크 두개로, 볼넷을 볼셋으로 바꾸는 것도 제안했다. 월드 시리즈를 야간 경기로 제안한 것도 핀리였다. 팀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위해 장발이나 수염도 허용했다. 1970년대에 에이스에 장발이나 수염 선수들이 많은 것이 바로 이 이유. 필라델피아 시절의 기억을 지우고, 오클랜드 고유의 상징을 도입한 것도 핀리 시절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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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21일 뉴욕 메츠를 제압하고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의 순간. 유니폼이 태평양 돌핀스 같다.

1969년부터 아메리칸 리그에도 지구제가 실시되었고, 마침 롤리 핑거스, 캣피시 헌터, 레지 잭슨, 바이다 블루, 진 테니스, 버트 캄파네리스, 살 반도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년 연속 지구 우승 및 1972년부터 1974년까지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다. 양대 리그를 통틀어 양키스를 제외하고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것은 이 시기의 에이스가 유일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때 선수들의 연봉이 상승하고 야구 환경으로 변화로 인해 프리 에이전트 제도가 실시되면서 자금력이 부족한 에이스는 주력 선수를 차례차례로 내 보낼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수한 선수들이 떠나면서 팀 전력은 약해졌고, 결국 핀리는 오너의 자리를 물러났다.

4. 월터 A. 하스와 1980년대의 영광

핀리가 팀을 판 후,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팀은 야구를 좋아하던 월터 A. 하스 전 리바이 스트라우스[2] CEO가 새로운 구단주로 등장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하스는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던 인물이었고, 그 결과 오클랜드에는 다시금 우수한 선수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핀리 시절에 잠시 사라졌던 흰 코끼리와 같은 상징도 재도입하면서 긴 역사를 가진 팀을 다시금 상기하기도 했다.

이런 투자와 함께 1981년 샌디 앨더슨이 단장으로, 1986년 토니 라루사가 감독으로 각각 부임하면서 상승세를 타게 된다. 이 때 오클랜드에서 뛴 유명한 선수가 최초의 40홈런 - 40도루 달성자인 호세 칸세코, A's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려낸 마크 맥과이어약쟁이 듀오배쉬 브라더스(Bash Bros.), 역대 최고의 리드오프 리키 헨더슨, 1이닝 마무리의 원조 데니스 에커슬리, 팀의 에이스인 데이브 스튜어트 등이다. 이들의 활약 속에 오클랜드는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리그 우승을 하면서 전성기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 최고의 전성기에 차지한 월드시리즈 우승은 1970년대와 달리 한 번 뿐이었다. 1988년에는 LA 다저스에게 1차전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커크 깁슨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흔들리며 결국 시리즈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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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물리치고 우승!

198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베이 브릿지 시리즈[3]에서 4:0 스윕으로 우승에 성공했지만, 1990년에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라던 신시내티 레즈에게 0:4 스윕 패배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게 되었다.

1992년 디비전 타이틀은 획득했지만,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에서 패하면서 그들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구단주 월터 A. 하스가 1995년 타계했고, 구단은 이제 돈을 쓸 수 없는 팀이 되었다. 그러면서 라루사 감독도, 전성기의 최고의 선수들도 모두 팀을 떠나면서 약체로 전락했다.

5. 빌리 빈의 머니볼 시대

90년대 중반에 3개 지구로 재편되면서 LA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텍사스 레인저스, 시애틀 매리너스와 같은 지구가 되었다. 더 이상 많은 돈을 쓸 수 없던 그들의 형편 상, 전력에서 뒤쳐지며 1990년대 후반부에는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1998년에 빌리 빈이 단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그 유명한 머니볼을 통해 적은 돈을 통한 효율적인 야구로 이름이 높았다.

연봉 총액도 낮고, 선수들의 면면도 그리 좋지 않아 보이던 이 팀은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매번 예상을 뒤엎고 미친 활약을 선보인 것. 2000년과 2001년에는 제이슨 지암비라는 뛰어난 타자가 버티고 있었다고 해도, 그가 FA로 팀을 떠난 뒤에도 2002년 20연승 기록을 세우고, 2003년에도 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빌리 빈이 만들어낸 팀에 대해서 크게 주목하기 시작했다.[4]


아메리칸리그 역대 최다 연승기록인 20연승 달성의 순간. 중계버전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 해냈다! 스캇 해티버그의 홈런!

머니볼이란 마이클 루이스의 책을 통해서 이름이 정립된 것인데, 거칠게 요약하면 이른바 5-tool이라고 일컫어지는 툴 중에서 쓸 데 없이 몸값을 올린다고 판단한 수비, 주루의 부분을 최대한 배제하고 선구안과 배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타격 툴에 비중을 두는 것이다. 사실 점수생산에 공헌하는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세이버메트릭스라면 머니볼은 거기에 예산 투입까지 고려했다. 때문에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 수비나 주루에 대한 비중을 줄인 것인데, 물론 다른 팀 관점에서 보면 신경도 안 쓰는 선수들이지만 이런 선수들이 모여 플옵에 나가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단 절대로 수비나 주력을 무시하고 선구안을 중시하는 것만이 머니볼은 아니다. 여담으로 이 마이클 루이스의 동명의 책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나와있고 상당히 재미도 있으니 한번 책을 보는 것도 괜찮지만, 저자가 내용의 재미를 위해서인지 약간 틀어놓은 점도 있다. 다소간의 비평은 필요하다.

머니볼 시대의 특징을 본다면, 먼저 선발 중시, 불펜 천시의 팀이라는 것이다. 선발은 싸고운 좋으면 연장 계약도 하고, 사오기도 하는데 불펜은 연장 계약도 없고 값 오를 때쯤 되면 짤없이 팔린다. 즉 주요 마무리 수출 팀 중의 하나다. 근 10년 간 제이슨 이스링하우젠, 빌리 코치, 키스 폴크, 최고의 자질 가진 옥타비오 도텔, 휴스턴 스트리트, 앤드류 베일리 등이 팔려나간 바 있으며, 팔린 마무리들의 일관된 공통점은 바로 옮긴 팀에서는 신나게 불쇼를 저질렀다는 것. 게다가 마크 멀더 리치 하든의 부도로 인해 믿고 쓰(면 큰일나)는, 유망주는 아낌없이(흠집내서) 주는 오클랜드 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라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오클랜드 산 선발은 괜찮은 평가를 받는다. 팀 허드슨 사례도 있고, 댄 해런 사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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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허드슨- 마크 멀더- 배리 지토 영건 트리오

특히 2000년대 초반 팀 허드슨- 마크 멀더- 배리 지토로 이어지는 영건 트리오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로 이어지는 3인방에 밀리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다. 이들은 최고의 활약을 보이던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허드슨과 멀더가 81승, 지토가 72승을 거두며 대활약했다. 그 뒤를 받치던 테드 릴리, 마크 레드먼, 애런 하랑, 코리 라이들 등도 준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는 투수들이였다. 하지만 연봉 문제로 허드슨과 멀더를 트레이드시키면서 첫 번째 3인방은 해체되었다.

2005년도에는 부동산 업계의 큰 손인 존 J.피셔와 루이스 N.울프가 힘을 합쳐 1억 8천만 불을 투자해 애슬레틱스 구단주가 되었다. 이후 피셔는 기존 그대로 스몰마켓을 지향하면서도 팀에 대한 투자에 상당히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6. 2006년의 성공과 추락

몸값이 싸던 지토만 재계약에 성공한 뒤 리치 하든과 지토 중심의 선발진이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새로운 영건인 댄 해런[5] 조 블랜튼이 성장하며 지토와 뉴 영건 트리오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 영건 트리오의 경우 하든의 꾸준한 부상[6], 블랜튼의 성장 정체[7] 등으로 사실상 댄 해런-배리 지토의 원투 펀치 수준으로 봐야 무방한 기간이었다.

그래도 프랭크 토마스라는 로또도 터지면서 2006년 마침내 미네소타 트윈스를 스윕하며 디비전 시리즈를 통과했지만, 결국 월드시리즈에는 진출에 실패했다. ALCS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0:4 스윕 패배를 당하면서 탈락한 것. 그리고 이 때의 절정기를 끝으로 길고 긴 구장 이전 문제와 리빌딩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구단 소유주도 새롭게 바뀌면서 구장 이전 문제로 인해 많은 지출은 어렵게 되었고, 언제 이전할지 모르는 구단에 정을 주지 않으면서 구단의 재정은 과거보다 더 악순환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빌리 빈의 리빌딩 결정으로 새롭게 형성한 선발진인 블랜튼, 하렌, 하든, 지토가 모두 팀을 떠나며 불펜에 있던 저스틴 듀셔러와 댈러스 브레이든이 선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둘은 사실상 낀 세대였지만 듀셔러는 2008년 중반까지 사이영 페이스를 보였고, 브레이든은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스위셔 트레이드에서 주워온 지오 곤잘레스, 하렌 트레이드에서 얻어온 브렛 앤더슨, 그리고 팀에서 원칙을 깨고 고등학생을 뽑은 몇 안 되는 유망주 트레버 케이힐이 2009~2010년에 터지면서 새로운 영건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렇게 결성된 오클랜드 선발 투수진은 영건 트리오 Ver. 3+댈러스 브레이든 정도에 5선발로 빈스 마자로, 타이슨 로스, 조시 아웃맨, 브랜든 매카시가 거쳐가는 형태다. 이 세번째 영건 트리오는 2009~2011년 5월까지 78승을 합작해냈는데, 중간중간에 앤더슨이 부상으로 빠졌다던가, 2009년은 지오 곤잘레스가 피칭에 눈뜨기 전이었던가 하는 점, 정작 중요한 오클랜드의 승률이 5할 주변에서 맴돌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오클랜드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머니볼 시대에는 끝내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성취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이렇게 된 것에는 잘 나갈 때는 신드롬까지 일으켰던 머니볼이지만, 그것도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가 널리 퍼진 이후에는 그런 이론은 30개 구단 모두 다 안다는 점에 있다. 결국 방법이 같으면 돈이 밀리는 오클랜드는 힘들기 마련. 단적으로 돈 많이 쓰는 오클랜드식 운영을 보여준 팀이 테오 엡스타인 보스턴 레드삭스. 여기에 빌리 빈의 트레이드에 대해 이제 사람들이 더 이상 속지 않으면서 화려한 트레이드로 상대를 속이는 전략은 취하기 힘들어졌고, 빅 마켓 구단 역시 더 이상 팜을 등한시 하지 않으면서 결국 돈에 밀리는 오클랜드는 혁신의 결과물을 오래 독점하지 못했다.

여기에 머니볼 드래프트로 알려진 2002년 드래프트의 성과물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반면[8]에 구체제파로 묘사된 구 드래프트 팀의 성과물은 상당히 괜찮았던 편[9]이었다. 이 드랩의 평가는 애매한데, 1라운드 픽 7개를 가지고 있으면서 메이저 선수 2명에 트레이드 카드 하나만 건졌다는 것은 분명히 실패작이지만 애초에 계약금의 제약까지 고려하면 반박도 가능하긴 하다. 그리고 빌리 빈의 황태자라고 불리던 에릭 차베즈가 부상에 이은 실력 저하로 오클랜드의 짐이 되어버렸다.[10] 또한 이 기간에는 빌리 빈의 장기였던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 보강도 잘 통하지 않았다. 밀튼 브래들리의 대가로 내준 안드레 이디어가 준수한 선수로 거듭났고, 맷 홀리데이의 경우는 그를 데려올 때 콜로라도에 내준 카를로스 곤잘레스가 대폭발한 반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홀리데이를 보내고 받은 선수들은 모두 실패하면서, 빌리 빈의 커리어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이런 실패가 겹치면서 머니볼 시스템에 대한 회의도 커졌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팀 성적이 5할을 넘지 못했던 5년간은 짧지만 암흑기라고 볼 수 있다.

6.1.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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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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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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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2년~2015년 : 머니볼 시즌 2

7.1.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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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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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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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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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16년~2017년 : 다시 리빌딩 모드로

8.1.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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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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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18년~2021년

야수들 중에서는 1라운드로 뽑아 애지중지 키운 맷 올슨, 맷 채프먼의 포텐이 터지며 팀의 주축 선수가 되었고, 투수진에서는 트레이드로 모은 유망주들인 크리스 배싯, 션 머나야, 프랭키 몬타스의 포텐이 터지며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매년 단기전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일찍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9.1.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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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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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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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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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2년~ : 라스베이거스로 떠나기 전 숨고르기

10.1.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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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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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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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히 1913년에는 같은 지역끼리의 '필라델피아 시리즈'가 개최될 뻔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내셔널리그 2위에 그쳐 안타깝게 성사되지 못했다. [2] 리바이스 청바지로 유명한 다국적 의류업체이다. [3] 어떻게 보면 가장 아찔한 월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지진. 1989년 10월 4일에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인 캔들스틱 파크에서 월드 시리즈 3차전이 펼쳐지기로 했는데 경기 시간 30분 전에 진도 7.1의 강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쳤다! 이 지진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TV로 생중계된 지진이었다는 것. 당시 ABC 방송 TV 방송 역사상 최고(!)의 오프닝입니다."라는 앨 마이클스(現 NBC Sunday Night Football의 캐스터)의 멘트가 압권이다(...) 결국 이 3차전은 취소되었고 무기한 연기 조치되었다. [4] 다만 2000~2003년의 애슬레틱스는 2010년, 2011년, 2012년, 2017년의 롯데 자이언츠와 마찬가지로 2승 3패로 맨날 한 끗차이로 무너졌었다. 특히 2001년,2003년은 2승을 선취했다가 3연패했다.(나머지 2번은 승-패-승-패-패), 여담으로 2000년,2001년은 디비전에서 2년 연속 뉴욕 양키스랑 붙었는데, 이 당시 뉴욕 양키스는 두 번 다 월드 시리즈까지 올랐고, 한 번은 우승했고, 한 번은 준우승했다,참고로 나머지 두 팀은 각각 미네소타 트윈스(2002)와 보스턴 레드삭스(2003)였는데, 둘 다 챔피언쉽에서 각각 1승 4패( 2002), 3승 4패( 2003)으로 탈락했다. [5] 멀더 트레이드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오클랜드로 이적. [6] 뉴 영건 트리오를 형성한 2005~2008년 전반기까지 평균자책점은 2점대 중반으로 화려했으나 선발 등판수는 44번에 승수는 20승에 그쳤다. [7] 이전의 영건 트리오에 비하면 부족한 성적이었다. 딱 준수한 2, 3선발 수준. 그래도 그 기간 동안 51승을 챙겼다. 하지만 필라델피아로 간 이후에는... 플러스원 취급. [8] 그나마 성공작은 1픽이었던 닉 스위셔이지만, 스위셔는 기존 틀에 집어넣어 보아도 충분한 1픽감이었다. 그 외는 조 블랜튼 정도가 성공작이고, 마크 티헨도 있었지만 빛을 본 것은 오클랜드를 떠난 다음이었다. 그외의 선수들은 대부분 메이저 진출 실패, 특히 머니볼 드래프트를 상징하는 선수인 제레미 브라운도 결국 메이저에 발도 제대로 디뎌 가지 못하고 방출당했다. [9] <머니볼> 책에서는 고졸 로또들을 지르는 1라운드 팀들을 비웃지만, 그해 고졸 로또들의 면면이 B.J. 업튼, 잭 그레인키, 프린스 필더, 콜 해멀스, 맷 케인, 존 레스터(...). 실제 스카우트들도 사이너빌리티 같은 문제들을 제외하면 "아 올해는 고졸이 대세구만"이라는 평가였다. 반면 대딩 투수라고 "그래도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대딩 뽑잖아"라고 칭찬했던 데이브 리틀필드의 1픽 브라이언 벌링턴은 2011년 현재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에이스가 되었다(...). [10] 2006년부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연봉이 1000만 불이 넘던 2008~2010 시즌에는 부상으로 거의 시즌 전체를 거르면서 3년 도합 3홈런 25타점에 그친다. 오클랜드에서 푹 쉰 뒤... 2012 시즌부터 성적이 반등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