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1913년의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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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fieldmarsch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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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원수 |
알프레트 폰 발더제 | 알프레트 폰 슐리펜 | 알베르트 | |
해군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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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대장 Generalober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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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상급대장 |
- 명예원수 루이트폴트 폰 바이에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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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대장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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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병과대장 |
게오르크 2세(작센마이닝겐)보병 | |
해군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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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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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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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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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Generalmajor / Konteradmir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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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소장 |
베른하르트 폰 뷜로 | |
해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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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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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백작 Alfred Graf von Walders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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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Alfred Ludwig Heinrich Karl Graf von Waldersee 알프레트 루트비히 하인리히 카를 폰 발더제 백작[1] |
출생 | 1832년 2월 28일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
사망 | 1904년 3월 5일 (향년 72세) |
독일 제국 하노버 | |
복무 |
프로이센군 (1850 ~ 1871년) 독일 제국군 (1871 ~ 1904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
주요 참전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의화단의 난 |
주요 서훈 |
검은 독수리 훈장 푸르 르 메리트 |
가족 | 조카: 게오르크 그라프 폰 발더제 |
종교 | 가톨릭[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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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군인. 독일 제국의 육군 참모총장을 맡았으며 의화단의 난 이후엔 중국에 주둔한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재임하기도 했다.2. 생애
2.1. 초기
발더제는 포츠담에서 군인을 대대로 배출한 가문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군인이었다. 1850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했으며, 상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2.2.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발더제는 포병대장이었던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밑에서 싸웠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 참여했으며, 소령으로 진급하며 일반참모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이후 제 9군단의 참모장교가 되었는데, 해당 군단은 하노버 왕국의 점령에 참여했다.2.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그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할때, 발더제는 중령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발더제는 자신의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메스(프랑스)에서의 큰 전투들에 참여했다. 발더제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의 참모장교가 되었다. 프란츠의 참모장교로서 프란츠 2세의 공을 더 세우게 도와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발더제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이후 발더제는 전역하지 않고 계속 군에 남았으며, 1881년, 참모차장이라고도 불리는 병참감으로 임명되었다. 고령의 헬무트 폰 몰트케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업무를 대신했다.
2.4.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
기병대장의 계급장으로,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가 전역하자, 1888년, 8월 10일, 발더제는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발더제는 미래의 카이저 빌헬름과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며 빌헬름 2세와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발더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자유주의에 반대했다. 발더제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믿었다.당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들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파악했고, 군대와의 연합을 원했다. 하지만 발더제는 이에 대해 걸끄러워했고, 비스마르크 역시 발더제를 의심했다. 발더제는 참모총장이었지만, 굉장히 야심찬 사람이어서 거의 대놓고 총리 자리를 원했다. 발더제는 사회주의자들을 견제했고, 반민주주의자였다. 게다가 유럽이 미래의 주축이 아니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적을 먼저 처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카이저가 된다면 민주주의가 성립될까봐 황태자를 견제했으며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까지 했다. 발더제는 빌헬름 2세에게 진보주의자, 유대인들의 위협을 강조했다. 심지어, 발더제는 이후 반유대주의 연설까지 했다. 결국 1891년 2월 7일, 참모총장은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되었다.
2.5. 의화단의 난
▲ 자금성에 주둔한 독일군을 통솔하는 발더제
이후 1900년, 의화단의 난 진압을 위해 발더제는 원수 계급장을 달고 중국으로 떠났다. 발더제는 반대파가 많았기 때문에, 일부는 발더제의 중국으로 보내는 것을 싫어했다. 이때 발더제는 독일군 뿐만 아니라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낸 다른 7개 나라들의 군대도 모두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다. 희생당한 사람 중 최고위직이 바로 독일 공사였기 때문에 독일이 총대를 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귀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신분제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과 프랑스는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했다.
발더제는 실질적으로 작전을 계획하지 않고 학살을 명령했다.[3] 하지만 이런 만행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1901년 "세계 평화를 위한 업적"으로 함부르크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하노버에서 3군 감찰관[4]이 되었고, 71세의 나이로 1904년에 죽었다.
3. 평가
발더제는 독일의 역사상 첫번째 정치군인으로 평가된다. 발더제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정계에서 가장 성공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빌헬름 카이텔처럼 무능하지 않고, 유능한 장교였다.다만 귀족으로서의 모습과 카이저의 신하라는 자부심이 있어서 카이저 이외에는 머리를 딱히 숙이지도 않았으며 공화국 군대인 프랑스군과 미군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