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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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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맥퀸이 설립한 영국의 명품 패션 브랜드에 대한 내용은 알렉산더 맥퀸(브랜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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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알렉산더 맥퀸
Alexander McQueen
CBE
파일:fashiondesigner_mcqueen.jpg
본명 리 알렉산더 맥퀸
Lee Alexander McQueen
출생 1969년 3월 17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루이셤
사망 2010년 2월 11일 (향년 40세)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직업 패션 디자이너
학력 Rokeby Preparatory School
센트럴 세인트 마틴
경력 알렉산더 맥퀸 (설립 / 1992 - 2010)
지방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1996 - 2001)

1. 개요2. 생애
2.1. 사망
3. 디자인 특징
3.1. 컬래버레이션3.2. 패션쇼 및 컬렉션
4. 브랜드5. 수상 목록6. 필모그래피

[clearfix]

1. 개요

영국 패션 디자이너. 별명은 "패션계의 악동". 자신의 이름을 딴 유명 명품 브랜드 알렉산더 맥퀸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초창기 그의 디자인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옷에 대한 모독이다 vs 천재적이다'. 결국 패션계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2. 생애

택시 기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맥퀸은 어릴 적부터 학교에 매일 패션 화보집을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그런 맥퀸의 모습을 본 또래 애들은 그를 맥 퀴어(McQueer)라고 놀려대기 일수였고, 나중에는 심한 따돌림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 후 맥퀸은 학교를 그만두고, 16세에 최고급 맞춤 정장의 성지인 런던 새빌 로의 양복점 '앤더슨 & 셰퍼드(Anderson & Sheppard)'에서 견습생으로 패션계에 입문하게 된다.

1992년 명문 패션 스쿨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며 졸업 컬렉션을 발표하고, 자신의 미들네임인 '알렉산더 맥퀸'이란 라벨하에 자신의 브랜드 또한 런칭하였다. 설립 과정에서 보그의 에디터였던 이사벨라 블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녀는 맥퀸의 졸업쇼 의상을 전부 사들이기도 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프랑스의 패션 하우스인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직을 맡은 바 있다.

이 시기는 프랑스의 럭셔리 그룹 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30대 디자이너들의 영입에 열을 올리며 정체된 브랜드들의 리뉴얼에 힘을 쏟던 때로, LVMH가 보유하고 있는 대표 브랜드들인 루이 비통,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로에베 등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한꺼번에 물갈이되는 대격변의 시기였다.[1]

2시즌만을 거치고 디올로 떠난 존 갈리아노의 후임으로 지방시 명가에 합류하게 된 맥퀸은, 지방시에서의 데뷔 무대인 1997 F/W 오트 쿠트르 컬렉션이 '역겹다'는 악평을 들으며 좋지 않은 출발을 보였으며, 떠나는 마지막까지 지방시와 그의 궁합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또 '마크 제이콥스'와 '존 갈리아노'의 경우, LVMH 측에서 개인 브랜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맥퀸에게는 그러한 지원이 없기도 했고.

이에 맥퀸은 2001년 LVMH에 버금가는 이탈리아의 럭셔리 그룹 PPR에 자신의 브랜드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그 대가로 지방시에서의 마지막 쇼인 2001 S/S 오트 쿠트르 컬렉션은 취소되고, 극소수의 VVIP만이 초대되어 살롱쇼 형식으로 선보이게 된다. 이 컬렉션은 프레스의 출입이 완전 통제되어, 그 어떤 보도자료도 없는 관계로 지금은 환상의 쇼가 되어버렸다. 컬렉션 테마는 아프리칸 에스닉을 중심으로, 그가 지방시에서 선보인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졌다고 한다.

이후 PPR의 '프랑소와 앙리 피노' 회장이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맥퀸은 지방시 시절에 습득한 고급 기술력과 든든한 자본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성장시키며 승승장구, 패션계를 대표하는 천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2.1. 사망

그의 디자인에는 늘 죽음에 대한 동경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그가 죽음을 희롱하는 사이, 죽음이 그에게 매혹을 느꼈던 모양이다.
칼 라거펠트
2010년 2월 11일, 어머니의 장례식이 열리기 하루 전에 그의 저택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향년 40세.

자살의 이유로는, 2007년 친남매와도 같았던 이사벨라 블로[2]의 자살, 3년 뒤 어머니의 암으로 인한 사망 등에 따른 우울장애로 예상된다.

생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맥퀸을 자주 사랴웃했던 레이디 가가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노래를 바치기도 하였다. 영상

3. 디자인 특징

F/W 2009 컬렉션
파일:fashiondesigner_mcqueen_show_1.jpg
파일:fashiondesigner_mcqueen_show_2.jpg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콘은 해골 프린트. 전세계적으로 해골 프린트의 스카프가 대유행 했으며, 국내에서도 가품이 넘쳐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중후반 런던을 기점으로 활동하던 초창기에는 기괴하며 날카롭고, 덜 다듬어진 거친 느낌의 의상들을 쏟아내며 영국 언더 패션계의 총아로 주목받았다. 그의 이름을 패션계에 한방에 각인시킨 그 유명한 ' 범스터 팬츠'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3.1. 컬래버레이션

비비안 웨스트우드 섹스 피스톨즈, 장 폴 고티에 마돈나가 서로에게 영감을 받아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면, 맥퀸은 비요크, 레이디 가가와 함께 하면서 많은 협업을 했다.

비요크의 경우 그녀의 곡 'Alarm Call'의 뮤직 비디오를 맥퀸이 디렉팅했고, 그녀의 Homogenic 앨범 커버는 맥퀸과 '닉 나이트'의 합작품이다.

레이디 가가는 맥퀸의 2010 S/S 레디 투 웨어 컬렉션의 피날레를 통해 자신의 신곡 Bad Romance를 전세계 최초로 공개하겠다고 밝혔고, 인터넷을 통해 동시 생중계된 이 컬렉션을 보기 위해 (가가팬들이 신곡을 듣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사이트가 다운되기도 했다. 가가의 2집 Born This Way에 수록된 'Fashion Of His Love'라는 곡은 맥퀸을 위한 헌정곡이다.

3.2. 패션쇼 및 컬렉션

같은 영국 출신의 또다른 천재 존 갈리아노와 함께, 패션쇼에 드라마틱한 요소를 많이 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간단히 정리를 해보면,

4.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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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상 목록

연도 시상식 수상 부문
1996년 영국 패션 어워드 (BFA) 올해의 디자이너 상
2003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
2003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 (CFDA) 올해의 국제 디자이너 상

6. 필모그래피



[1] '루이 비통 - 마크 제이콥스', '크리스챤 디올 - 존 갈리아노', '지방시 - 알렉산더 맥퀸', '로에베 - 나르시소 로드리게즈' [2] 'TATLER'의 전 에디터, 스타일리스트이자 명망 높은 패션계 인사. [3] 저 로봇은 자동차 공장에서 가져왔으며 대량생산되는 몰개성한 패션을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