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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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682B4> 위(魏)나라 4대 왕 안희왕 安僖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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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희(姬) | |
씨 | 위(魏) | |
휘 | 어(圉) | |
아버지 | 위소왕(魏昭王) 위속(魏遬)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43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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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 위(魏)나라의 6대 국군, 4대 왕. 위소왕의 아들. 위경민왕의 아버지. 사기에서는 위안리왕(魏安釐王)으로 나온다.[1]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
위안희왕 원년(기원전 276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성 2개를 함락시켰다.위안희왕 2년(기원전 275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2개 성을 다시 먹고 대량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한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하러 왔지만, 위나라는 온(溫) 땅을 진나라에게 주고 강화했다.[2]
위안희왕 3년(기원전 274년), 백기(白起)가 위나라를 쳐서 4개 성을 함락시키고, 4만명을 죽였다. 바로 이때 화양에서 대패했다.
위안희왕 4년(기원전 273년), 진나라가 삼진 연합군을 격파하고, 15만명을 죽였다.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가 달아나고, 위나라 장수 단간자(段干子)가 남양(南陽) 땅을 진나라에 주며 강화를 청했다.
위안희왕 9년(기원전 268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회(懷)를 함락시켰다.
위안희왕 10년(기원전 267년), 위나라에 인질로 왔던 진나라 태자가 죽었다.
위안희왕 11년(기원전 266년), 진나라가 위나라의 처구(郪丘)를 함락시켰다.
위안희왕 20년(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해 조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평원군의 아내인 신릉군의 여동생이 평원군을 통해 위나라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때 진비(晉鄙)가 구원하러 갔다. 그러나 위안희왕이 진나라를 두려워해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게 했다. 신릉군은 위안희왕이 총애하는 후궁 여희를 통해 병부를 얻어 진비를 찾아갔는데, 신릉군이 거짓 왕명으로 군대를 거두어 조나라를 구원하라고 하자, 진비가 이를 수상히 여겼고, 신릉군은 도축업자 출신 식객 주해를 시켜 진비를 격살했다. 그리고 병권을 쥔 신릉군이 정예병 8만을 이끌고, 조나라로 가 진군을 궤멸시키고, 포위를 풀었다. 이에 위안희왕은 신릉군을 상장군에 봉했다. 그리고 신릉군은 조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위안희왕 30년(기원전 247년), 신릉군이 위나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5개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하외에서 진군을 격파하고, 장수 몽오(蒙鷔)를 내쫓았다. 위나라 태자 증(太子 增)이 진나라에 인질로 있었다. 진장양왕은 태자 증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장양왕을 모시는 어떤 신하가 태자 증을 위해 왕에게 간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해 증을 가두게 하는 것은 일찍이 공손희(公孫喜)라는 자의 음모이며,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제나라와 한나라 등에게 위나라가 의심받도록 하라고 했다. 이에 장양왕이 증을 가두지 않아 무사하게 되었다.
위안희왕 34년(기원전 243년), 안희왕이 죽었다. 그리고 태자 위오(위증)가 그 뒤를 이어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위경민왕이다.
3. 여담
미동인 용양군(龍陽君)을 총애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용양지벽(龍陽之癖)이라는 동성애 고사가 나왔다.4. 대중매체
2018년 드라마 심진기에 등장한다. 동생 신릉군에 의해 아들이 암살당했고 위안희왕은 감금당했고 살기 위해서 미친 것처럼 연기를 했다.4.1. 만화 킹덤
직접 등장하는 건 아니고 위왕 경민왕의 선왕으로 언급된다.안희왕은 진나라가 소양왕이었던 시절 위화룡칠장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일곱 장수를 임명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자백의 동생 문제로 여섯 명이 각자 셋씩 파벌을 갈라 싸운 끝에 세 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진노해 그 셋을 죽이려고 했으나 당시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던 오경 장군이 설득해 죽이지는 않고 죽은 걸로 처리해서 셋을 지하감옥에 가뒀다. 이때 갇힌 화룡의 직속 부하들도 같이 갇혔다.
4.2. 만화 달인전
신릉군의 형제라 킹덤과 달리 직접 등장한다. 의협에 불타는 신릉군의 제안을 적절히 제어하며 진비를 통해 조를 돕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진과의 관계를 염려해 적당한 선에서 멈추게 하는 등 무난한 군주로 묘사된다.신릉군이 진비를 죽이고 군을 이끌어 조로 향한 뒤에 등장은 하지 않지만 지금 밖으로 나가면 암살자들이 달려들거라며 기겁하는 신릉군의 말을 빌어 보아 크게 분노한 상황. 진에 힘을 합쳐 항거해야하는 상황이니 신릉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안희왕 입장에서는 명백히 자신의 권위를 넘보는 행위였기에 신릉군은 조에서 10년 가까이 보내게 된다.
이후 평원군이 죽고 뭔가 깨달은 듯 위로 돌아온 신릉군의 부탁에도 즉시 옥에 가두지만, 그로 인해 자신도 무언가 안심하게 되었다는 독백을 한다. 이후 진이 연달아 왕의 붕어로 흔들리자 그를 풀어주고 상장군에 임명해 진을 공격하게 한다.
허나 이사의 계책에 의해 계속해서 신릉군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하게 되고 결국 진비의 동생을 보내 신릉군의 군권을 회수하고 불러들이게 된다. 이로인해 신릉군과 안희왕의 관계는 완전히 깨지고 신릉군은 칩거하며 주색에 빠지고 있다는 소문만 돌게 된다. 진의 침공과 조의 침공에도 두문불출하자 왕명을 내세워 계속해서 신릉군을 소환하려 하나 실패하고, 오히려 염파가 위로 망명한다고 하자 신릉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것이라며 분노하는 등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신릉군이 죽고 같은 해에 안희왕 역시 사망했다는 나레이션과 함께 피를 토하며 죽는다.
초중반까지는 나름대로 형제간의 사이도 괜찮았지만 이사의 계책에 휘둘린 이후부터는 기존의 의심과 함께 신릉군을 적대하게 된다. 게다가 신릉군이 스스로 두문불출하며 전쟁에 출진하라는 명도 거절하자 기존의 의심병이 더욱 심해져 신릉군을 적시하게 되고 심지어 신릉군이 죽고나서도 그 녀석을 벌해야한다며 계속 부르라며 미쳐버리기 까지 한다.
[1]
사마천의 할아버지 사마희(司馬僖)의 이름을 피휘했기 때문이다.
[2]
온 땅은 하내 부근의 땅으로
진문공 이후
진(晉)나라와
삼진(三晉)의 영역이었는데, 그곳이 넘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