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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2:30:44

안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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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원규.jpg
출생 1878년 8월 28일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
사망 1947년 5월 22일
하와이 호놀룰루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서훈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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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원규는 1878년 8월 28일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에서 부친 안문악(安文岳)과 모친 정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3년 미국 하와이로 이주한 뒤 감리회에 입교했고, 1906년 3월 하와이 오하우 지방의 와이파후 농장에서 환난상구(患難相救)와 일화배척(日貨排斥)을 목적으로 공동회(共同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어 동포들의 자치생활을 지도했다. 그 후 1907년 9월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합동발기대회에 참석하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임되어 조국의 국권 회복과 한인 동포들의 안녕 보장, 민족교육 장려에 힘썼다.

1908년 11월, 미 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미주 전역의 통합 한인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발기인 모임에 한인합성협회 발기인의 자격으로 참석하여 1909년 2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창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09년 7월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1910년 4월에는 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끌었다. 그러던 중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들을 호놀룰루에 소집시켜 대동공진단(大同共進團)을 조직하고 재무로 선임되어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와 연서로 일본 왕에게 일제의 한국 강점을 강력히 반대하는 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위해 각 지방에 독립군양성소를 설립하고 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1914년 6월, 안원규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演武部) 사업을 후원하기 위해 박종수(朴種洙)와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 지방에 있던 약 1,500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을 기부하여 박용만을 단장으로 하는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의 창립을 적극 후원했으며 1,200달러 상당의 자금을 기부했다. 그러나 하와이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박용만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던 이승만이 1921년 3월 하와이 국민회를 해산시키고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령(臨時居留民團令)에 따라 하와이 대한인교민단(大韓人僑民團)을 조직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해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하와이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이승만과 박용만의 대립으로 분열된 한인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33년 1월 이승만의 이탈과 내부 분란으로 유명무실해진 대한인교민단을 해체한 뒤 하와이 대한인국미회를 제건했으며, 1936년 1월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국민부담금제도를 통해 국민회의 채무를 청산하는 한편, 혈성금제도(血誠金制度)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상비를 조달하고 노인 동포의 노후를 위하여 호상부제도를 실시하는 등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부흥을 꾀했다. 1939년 중국의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시국을 논의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그는 이에 호응했고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했으며,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문제, 대미외교기관(對美外交機關)의 설치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했다.

이후 1941년 8월 미주 내 모든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議事部)가 설치되자,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했다. 한편 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 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外交事務所)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했다. 이로 인해 한인 외교 담당을 두 단체가 수행하게 되어 분란이 발생하자, 임시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해 11월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위원을 새로이 선임했다. 임원규는 이때 임정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을 전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45년 1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46년 1월에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국민보>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던 1947년 5월 22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원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8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