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안세환(安世桓) |
생몰 | 1892년 3월 25일 ~ 1927년 4월 20일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남항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세환은 1892년 3월 24일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남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경에 신민회에 가입했고 신민회 동지인 차이석, 임치정 등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펼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평양기독서원(平壤基督書院) 총무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 5가의 함태영의 집에서 이갑성, 오상근, 현순, 신홍식, 김세환, 함태영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천도교 측과의 연합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이튿날에는 다시 세브란스 병원 내의 이갑성의 병실에서 이승훈, 박희도, 오기선(吳基善), 오화영, 신홍식, 김세환, 함태영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천도교와의 연합 문제를 재차 논의했다.2월 22일, 안세환은 기독교 대표들과 논의 끝에 천도교 측과 무조건 연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은 임규(林圭)와 함께 일본 정부에 한국의 독립을 통보하고 일본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에 독립청원서와 이유서를 전달할 책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박희도로부터 여비 500원을 받고 2월 27일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3월 1일 도쿄역에 도착, 신전구 준하대의 용명관에 투숙했다. 3월 4일, 그는 경시청에 찾아가 경시총감을 만나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다가 3월 5일 전격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이 지속되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안세환은 석방 후 정신병에 걸려 몇년간 고통받다가 1927년 4월 20일에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안세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1년에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그의 유해를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