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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38:10

안봉채

파일:안봉채.jpg
성명 안봉채(安鳳彩)
생몰 1901년 11월 14일 ~ 1977년 11월 4일
가족 관계 부인: 조모란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금사리
사망지 광주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봉채는 1901년 11월 14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금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강진보통학교에 재학할 때 3.1 운동 1주년 기념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수일 간 구금당했다. 이후 소작인으로 살아가다가[1] 지주들이 소작료를 마음대로 올려받자 이에 반감을 품고 오원식, 오춘선, 윤주배, 오완석, 조동헌, 김호기 등과 함께 군동면 소작공제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걸고 항쟁하기로 결의했다.
1. 소작료 제정은 계약에 따라 3 : 7제로 실시할 것
2. 소작지의 이동을 지주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자행하지 못할 것
3. 소작료 수납에 있어 양기(量器)의 정확한 사용
4. 수납인의 횡포를 엄금할 것

1931년 1월 16일, 그는 군동면에서 강진군 소작인대회를 개최해 강진군의 각 지역 대표를 포함해 소작인 300여 명을 모으고 군 당국에게 현재의 소작료는 너무 가혹하니 소작료를 2할 감하지 않을 경우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했다. 지주 측이 이에 불응하자, 소작인 200여 명은 11월 28일 지주인 목포겸전산업주식회사(木浦鎌田産業株式會社)에 몰려가 회사를 포위하고 회사원을 구타했다.

이 일로 그를 포함한 소작인 집행부 6명이 경찰에 검거되었고,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한밤중에 경찰서로 몰려가 “검속자 석방”, “소작료 감액”을 외치며 새벽까지 시위를 벌임으로써 쟁의는 더욱 확대되었다. 500여 농민의 기세에 놀란 일제는 군내 각 주재소는 물론 해남과 장흥의 경찰, 군내 재향군인회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결국 농민들은 해산되었다.

이후 안봉채는 1932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폭력 행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광주에 가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7년 11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안봉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1] 강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