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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안종명(安鍾鳴), 안응삼(安應三) |
출생 | 1895년 8월 28일 |
안동부
함창군 상서면 안용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안용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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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4년 3월 18일 |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통5정목
세브란스병원 (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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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9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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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안만이는 1895년 8월 28일 안동부 함창군 상서면 안용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안용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16년 11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1년 1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 9월부터 1922년 3월까지 6개월간 고향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를 모았으며, 1922년 3월에 다시 만주로 망명해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참의부(參議府)에 가입하여 1925년 2월까지 활동했다.
1925년 2월에 귀향한 안만이는 그해 3월까지 20일간 상주에서 활동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해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했다. 신민부에서 김좌진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6년 8월 23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화폐, 지폐, 은행권, 증권의 위조, 변조, 모조권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해 신민부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32년 9월, 안만이는 반길군고봉림군(反吉軍考鳳林軍)에 입대하여 반만항일전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제1차 쌍성보 전투에 참여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서에 조영원(趙永元)과 함께 체포되어 신의주에 호송되어 취조를 받았다. 이후 석방되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1934년 3월부터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로5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1934년 3월 18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만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 10월 17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