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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9 02:09:53

아프린

파일:시리아 아프린.jpg
언덕에 자리한 시가지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11.jpg
도시 남쪽 아인 다라 (عين دارة) 신전의 사자상. 2019년 친튀르키예 시리아 반군 소속 알 함자트 조직에 의해 도난되었다.

1. 개요2. 역사
2.1. 시리아 내전
3. 갤러리
3.1. 아인 다라

1. 개요

아랍어 عفرين
쿠르드어 ئەفرین
영어 Afrin

시리아 북부의 도시. 알레포에서 서북쪽으로 30km, 아자즈에서 서남쪽으로 14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국경 도시까지는 아니지만 서쪽과 북쪽 20km 지점에 튀르키예-시리아 국경이 있다. 지명은 도시를 관통하는 아프린 강에서 유래되었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약 4만이었고, 시리아 북부의 주요 올리브 생산지로 유명했다. 쿠르드인 거주 지역 중 최서단에 위치한 도시로, 내전 발발 후 2012년 여름 쿠르드계 인민방위대가 접수하였다. 하지만 2018년 봄 튀르키예군과 시리아 반군이 점령한 후 튀르키예 동화 정책을 펼치고 있고, 이따금씩 테러가 발생하는 등 여전히 불안정하다.

2. 역사

일대의 어원이 된 아프린 강은 아시리아 시기에 아프레, 셀레우코스 왕조기에 오이노파라스, 로마 제국기에 우프레누스라 불리다 중세 이슬람 기에 아프린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프린 협곡은 오론테스 강의 지류로써 안티오크 가지안테프, 알레포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자 방어와 농경 모두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청동기 무렵부터 일대에 흩어진 언덕들에 고대 도시들이 세워졌고, 그중 현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아인 다라는 아람- 히타이트계 유적이 잘 남아있다. 특히 기원전 1300년경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슈타르 / 아스타르테 / 바알 하다드 신전은 구약에서 묘사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1 성전)과 거의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20세기 후반 수차례 발굴되었다.

아프린 협곡은 쿠르드 인들의 원적지인 튀르키예 동부에서 매우 멀지만 16-17세기 무렵 다수의 쿠르드인들이 정착하였다. 1599년 일대를 지난 영국인 여행가 윌리엄 비둘프는 이스칸데룬과 알레포 사이의 산지에 '악마 숭배자'들이 산다고 기록하였는데, 바로 종종 악마 숭배자라는 오명을 쓴 야지디 쿠르드인들을 지칭한 것이다. 현재의 아프린은 19세기의 시장에서 출발해 점차 도시화되었다. 1929년 인구 8백의 마을에 불과하던 아프린은 프랑스 위임 통치기에 발전하였다. 본래 강의 서안 언덕에 자리하던 시가지는 동안으로 확대되었고, 1968년에는 인구가 7천으로 불어났다. 1999년 쿠르드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의 체포 후 시위가 일었고, 2004년 3월 카미실리 봉기와 함께 폭력 시위가 벌어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였다.

2.1. 시리아 내전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유적.jpg 파일:시리아 아프린 공세.gif
튀르키예군의 공습으로 완파된 아인 다라 신전 튀르키예군의 아프린 공세

시리아 내전 발발 직후인 2012년 여름, 다른 쿠르드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부군이 철수하자 쿠르드 인민방위대가 장악하였다. 2014년 1월에 선포된 로자바 연방에서 아프린은 5대 자치주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현지 인민방위대와 아사이쉬는 반대파를 임의 체포하고 소년병을 모집하며 민간인을 약탈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큼 문제점이 많았다. 특히 아랍인들의 자발적인 이주를 유도하기 위해 높은 세금과 각종 규제를 부과하여 그들이 반군이나 튀르키예군에 협조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국경 너머 쿠르드 세력의 발호가 국내 쿠르드 인들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킬까 염려하던 튀르키예는 2018년 1월, 올리브 가지 작전을 선포하며 아프린으로 진격하였다. 튀르키예군은 광범위한 폭격에 나섰고, 1월 28일경 아인 다라 신전이 피격되었다.쿠르드 당국은 유적지 보호를 위해 국제 사회의 개입을 요청하였고, 전황이 악화되자 2월 20일 시리아 군이 쿠르드 편에 참전해 아프린에 병력을 파견하였다.

다만 3월 들어 튀르키예군과 반군이 남북으로 아프린을 압박한 끝에 3월 18일 도시를 점령하였다. 두달 간의 전투 끝에 양측 합쳐 2천여 군인과 5백여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점령 직후 선거를 통해 11명의 쿠르드인, 8명의 아랍인, 1명의 튀르크멘으로 구성된 시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튀르키예-반군 통제 하에서도 아프린에선 여전히 범죄와 폭력이 만연하며, 특히 쿠르드 주민에 대한 술탄 무라드나 함자 부대와 같은 반군의 횡포가 심하다 한다. 튀르키예 측이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민방위대의 임의 체포와 고문, 강제 이주, 재산 몰수, 약탈 등에 있어 친튀르키예 반군은 쿠르드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는 평이 많다. 구관이 명관 튀르키예 당국은 사실상 이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아 여론의 불만이 크다. 2020년 4월에는 폭탄 테러로 11명의 아동을 포함한 40명이 사망하였고, 2021년 10월에도 차량 테러로 10여명이 사망하였다. 튀르키예는 인민방위대, 쿠르드측은 반군 간의 내분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3. 갤러리

파일:시리아 터키 침공.png
튀르키예군의 올리브 가지 작전 전개도

3.1. 아인 다라

파일:시리아 아인 데라.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4.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7.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1.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22.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3.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4.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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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데라 기타 사진들]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19.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2.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71.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6.jpg 파일:아인 다라 시리아 5.jpg
파일:시리아 아인 다라 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