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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아 왕국 5대 군주 Ḥārīṯat | 아레타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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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아레타스 3세 |
아람어 | Ḥārīṯat | |
그리스어 | Αρέτας | |
라틴어 | Aretas III | |
별명 | 필헬렌(Philhellen: 그리스인의 친구) | |
존호 | 왕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62/61년 또는 60/59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84년 ~ 기원전 62/61년 또는 기원전60/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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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테아 왕국 5대 군주.2. 행적
나바테아 왕국 3대 군주 오보다스 1세의 아들로, 기원전 84년 숙부 라벨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확장 정책을 이어갔고, 페트라에서 엘리아트로 이어지는 경로 중간에 아바루 시를 건설했다. 또한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무력 충돌을 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12세는 변경지대를 지속적으로 침략하는 나바테아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에 착수했다. 형제 필리포스 1세는 그가 원정을 떠나느라 다마스쿠스를 비운 틈을 타 쳐들어갔는데, 도시 총독 밀레시우스가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밀레시우스는 새 주인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기를 들어 필리포스 1세를 다마스쿠스로부터 몰아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필리포스 1세는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필리포스 1세가 다스리던 시리아 북부를 공략하려 하지 않았다.이듬해, 안티오코스 12세는 나바테아 원정을 재차 감행했다. 그는 적이 국경 지대 방비를 강화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사해를 거슬러 내려가서 나바테아 왕국의 배후를 급습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안티오코스 12세가 유대를 정복하려고 쳐들어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야나이 방어선'을 건설했다고 한다. 방어선은 카파사바에서 요파 인근까지 28km에 달했다고 하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방어선을 뚫고 계속 행진했다고 한다. 이후 셀레우코스군과 나바테아군은 카나 마을 인근에서 격돌했다. 카나 마을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사해의 남서쪽일 거라고 추정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바테아군은 위장 퇴각했다가 추격하는 적을 향해 맹렬히 반격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공격을 견뎌냈지만,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가 그만 전사했다고 한다. 왕의 전사에 전의를 상실한 셀레우코스군은 붕괴되었다. 한때 학계에서는 카나 전투가 기원전 86년 즈음에 벌어졌고, 안티오코스 12세를 물리친 나바테아 왕은 오보다스 1세라는 설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82년에 주조된 안티오코스 12세의 주화가 발견되면서, 안티오코스 12세의 전사는 기원전 82년에 벌어졌으며, 그를 죽인 왕은 오보다스 1세가 아니라 아레타스 3세라는 설이 대세로 굳어졌다.
나바테아군은 셀레우코스군을 격파한 뒤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이후 다마스쿠스 등 시리아 남부 일대는 나바테아 왕국의 소유가 되었고, 안티오키아 등 시리아 북부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에게 복속되었다. 그는 현지 그리스인들을 회유하고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표준을 사용하여 새로운 청동화를 주조했다. 이때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필헬렌(Philhellen: 그리스인의 친구)이라는 별명을 주화에 새겼다. 그러나 기원전 72년 또는 71년에 다마스쿠스가 티그라네스 2세에게 귀순하면서, 나바테아 왕국은 시리아 남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렇듯 셀레우코스 제국을 사실상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뒤, 그는 유대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와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다. 한때 아디다 전투에서 유대군을 격파하여 지중해의 남동부 해안 영토를 빼앗았지만, 야나니가 얼마 후 반격을 가하여 되찾았다. 그는 야나니의 숙청을 피해 망명해온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유대 왕국의 내분을 유도했다. 기원전 76년 야나니가 사망한 뒤 여왕으로 등극한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계획이 틀어지는 듯했지만, 기원전 67년 살로메 알렉산드라 사후 두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내전에서 패한 뒤 권좌에서 밀려났던 요한 히르카노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요한으로부터 일이 성공하면 지난날 야나니가 나바테아인들로부터 빼앗았던 모압의 12개 도시를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5만 대군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에 가둬놓고 기원전 65년부터 공성전을 벌였다. 바로 이때,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시리아에 도착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즉시 스카우루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구원을 호소했다. 스카우루스는 즉시 그에게 사절을 보내 예루살렘 포위를 해제하지 않으면 로마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지중해 세계 최강국인 로마와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되지 않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후퇴하는 나바테아인들을 추격해 요르단 계곡의 파피론에서 격파했다. 그 후 시리아 초대 총독이 된 스카우루스는 나바테아 왕국으로 쳐들어가서 여러 지역을 황폐화시켰지만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를 공략하지 못했다. 스카우루스는 에돔인 안티파트로스를 그에게 보내 협상했고, 그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딸 시피로스를 시집보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파트로스는 스카우루스의 빚을 갚아준다면 포위가 풀릴 거라고 설득했다. 그는 이에 따랐고, 스카우루스는 곧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그의 사망년도와 후계자에 관해서 2가지 설이 제기된다. 첫번째 설은 기원전 62/61년에 사망하고 오보다스 2세가 뒤를 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설은 기원전 60/59년에 사망하고 말리코스 1세가 후계자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