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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2:17:03

쌍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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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 전투
雙嶺 戰鬪
파일:539f4fffb984083907d48334a271dac0.jpg
명칭 한국어 : 쌍령 전투(雙嶺 戰鬪)
날짜 1637년 1월 28일 (인조 15년 정축년 1월 3일)
장소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결과 전술적 쌍방 패전. 경상도 근왕군 동원 실패와 남한산성의 구원 실패로 인한 청군의 결과적 승리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민영
파일:조선 어기.svg 허완
파일:조선 어기.svg 선세강 [1]
파일:조선 어기.svg 윤여임
파일:조선 어기.svg 손종로
파일:조선 어기.svg 백선남
파일:조선 어기.svg 김충선[2]
파일:청나라 국기.svg 아이신기오로 요토
파일:청나라 국기.svg 실투 [3]
파일:청나라 국기.svg 악다귀[4]
병력
2,000명 추정[5] 3,000명 ~ 7, 500명 추정[6]
피해 규모
전사자 불명[7] 최고 지휘관 전사[8]
피해 규모 불명

1. 개요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2.2. 청측의 기록
3.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3.1. 조선군의 병력 규모 추정3.2.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4.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4.1. 4만 병력 패퇴설? (청군 300기설?)4.2. 지휘관 무능설?4.3. 여타 패인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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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자호란 때 있었던 대규모 전투.

청군과 조선군 양측 모두 서로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최악의 전장에서 마주쳐 벌어진 전투[9]로, 조선군은 2천명의 숙련 포수와 고위 지휘관이 몰살 당하고, 청군은 고작 2000명 상대로 그 수배에 달하는 정예 팔기가 핵심 지휘관들[10]과 함께 공포에 빠져 격퇴당한 격전이었다.

청군이 숫적 우세와 팔기군의 숙련도에 힘입어 반격해 조선군을 궤멸시키는데 성공은 하였지만, 청나라측 기록에 의하면 피해가 심각했고 최정예 근위대가 보인 추태로 인해 큰 망신을 당한 격이다. 후술하겠지만 청군의 입장에선 팔기에서 가려뽑은 최정예 바야라 호군의 상당수를 지휘관과 함께 손실했고, 아이신기오로 일족까지 위험하게 만든 추태[11]를 보여 속이 뒤집어지는 전투였으나 결국 전략적 승리를 거뒀고, 조선군 입장에서는 크게 분전하기는 했으나 지휘부의 궤멸로 인해 경상도 근왕군 동원에 실패해 병자호란 패전의 결정적 원인이 되는 큰 전략적 패배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에서 제승방략이 보여준 조선군의 고질적 문제가 그대로 반복된 것으로, 조선이 조금이라도 전쟁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면 병자호란의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안타까운 전투라 할 수 있다.

2. 쌍령 전투의 전개

2.1. 조선측의 기록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또 우진에 닥쳐오므로 민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니 맞은 자가 바로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적이 이때를 틈타서 총돌격하니 마침내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 감사 심연(沈演)이 화완이 도망쳐 살아 있다고 치계하였기 때문에 증지과 사제(賜祭)의 은전이 민영에게 미치고 허완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허완의 아들 장()이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연후에 증제(贈祭)하였다.
- 연려실기술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소집된 경상도 속오군 4만명[12]은 동원되는 대로 그대로 북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집결중이던 병력이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로 구성된 청의 병력과 조우하였다.[13]

다만 쌍령 지역은 절대 4만 명의 대병력이 모두 주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쌍령 전투에 휘말린 병력은 최대 8천여명 쯤으로 추정된다. 임용한 박사는 장부상 병력 4만에 실제 급하게 소집된 군대는 8천이고 이중 쌍령에 실제로 집결하여 청군과 싸운 선발대는 2천명이라고 주장했다.[14] 또한 임용한 교수는 학계에서도 '조선군 4만명설'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취급한다고 설명하였다. 출처

제대로 동원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매우 부적절한 지형에서 대량의 팔기와 마주처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속오군을 동원중이던 지휘관들이 죄다 몰살당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자세한 전투 양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데, 급히 동원되어 집결하면서 북상하던 서로 흩어진 병력이 다발적으로 갑자기 쌍령에서 청군과 만나 싸운 만큼 전투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군이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구체적으로 어느정도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쌍령 전투 이후 무려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 등에 따르면 전투 당시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기록에선 분명 허완이 분전하다가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비국에서 허완을 추증하기를 청하다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허완은 후술하겠지만 오랜 경력을 가지고 능력을 인정받은 장수라 연려실기술의 이 묘사는 부정확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15]

어쨌든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토대로 계속 상황을 복원해보면 당시 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16]한 탓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모두 폭발하는 바람에(단, 이 폭발사고 기록도 당대 실록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기록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결국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 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을 보면 허완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민영의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했다는 기술이 있다. 또한 저 청군 300기에 대한 기록은 막상 실록이나 청측의 기록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이렇게 청군이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의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고, 이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여기까지 보면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채 적과 마주쳐 크게 패배한 참패였겠지만...

2.2. 청측의 기록

그런데 청 태종 문황제실록에 따르면 조선측의 기록과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들이 나온다.

조선군의 입장에선 (학계의 추정치를 따르자면) 약 8000명의 병력들이 어떻게든 산 넘고 물 건너 집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봉부대로서 어느 정도 모인 약 2000명의 선발병력들이 방어전을 펼치다가 청군의 팔기(기병대) 돌격에 결국 무너져서 일방적으로 궤멸당한 참패였다고 하나, 청측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 2000명의 선봉부대 앞에 최정예 기병대로 돌격을 펼친 청의 팔기들이 졸전 끝에 간신히 승리했으나 매우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 측이 대군으로 덤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가 부상하고 죽거나 적전도주를 한 장교들을 처벌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대군이 참패했다며 자국을 비하하고 있는 연려실기술의 기록이 야사인만큼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확인된다. 당사자인 청 측의 기록에 기반해 볼 때, 조선군 포수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매우 분전한 셈이다.
계해년 먼저 조선을 정벌했을 때의 일이다. 그 국왕을 포위했을 당시 외부에서 원병이 도착하여, 도로이 버일러[17] 요토가 병사를 이끌어 실투, 악다귀가 요토의 명을 받들고 매 니루(牛彔)에서 호군 1명,과 매 기(구사)에서 호군교 1명씩[18]을 받아 언덕 위에 가 주둔했는데, 실투와 악다귀가 적에게 나아가 싸우니 악다귀가 상처를 입고 먼저 돌아왔으며 실투는 부대를 이끌고 적병을 쳐 패배시킨 뒤 언덕 위에 섰다. 이에 요토가 사람을 보내 명을 내려 회군하도록 고하자 실투가 명에 따라 부대와 함께 퇴각하였으나 그 후군을 맡던 중 상처를 입어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실투와 동행하던 니루 부대원으로 고마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말에서 내려 말하기를, "장군께서 돌아가셨다. 어찌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하였다. 본대 구사의 국구 아시다르한 니루 휘하의 호군교인 부당커러가 이를 듣고는 소리 높여 병사들을 막아 세우고 실투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명령, 또한 본 구사 바얀 니루 휘하의 순다리, 오묵투 니루 소속 사무하투, 샤오사이 니루 소속 커피다 3명을 베라는 명령을 각각 내렸다. 그러나 부당커러는 시신을 탈취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군을 이끌고 버일러가 있는 군영까지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적병에게 진격하는데도 부당커러는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석교하를 건너 본영에 이르러 부당커러는 채찍질 100대와 귀,코를 꿰뚫는 형벌, 호군들도 채찍 100대와 귀, 코를 꿰뚫는 형벌, 그리고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단 등 3명은 이미 부당커러가 불렀는데 명을 받들지 않은 것이므로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며, 또한 호군교 다다이 니루 휘하의 니칸, 수르투 니루 휘하 소속 퉁쟈샨, 어미나 니루 소속 허터 등도 사형으로 논죄함이 마땅하다고 상주했다.
께서는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단, 호군교 니칸, 퉁쟈샨, 허터 등 6인은 죽음을 면하고 채찍질 1백 대와 귀, 코를 꿰뚫는 형벌로 감하도록 명하셨고, 부당커러 등 적을 앞에 두고 나아가지 않은 자들은 귀와 코를 꿰뚫는 형벌을 면하고 채찍질 1백 대로 감하도록 하셨다.
태종 문황제 실록 숭덕 2년(1637년) 윤4월 25일 기사

청측의 기록은 수수께끼 투성이다. 조선측의 기록에서는 악다귀의 1차 돌격으로 조선군이 패닉에 빠지면서 그대로 몰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정작 청측 기록에서는 악다귀의 야심찬 1차 돌격은 처참하게 실패하였고, 되려 지휘관인 악다귀가 부상을 입고 본진으로 패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2차 돌격에서 실투가 조선군을 무찔러 언덕 위에 포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요토가 승리한 실투 측에 회군령을 내렸고, 청의 팔기들은 그대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이 와중에서 퇴각 중 후군(殿)을 담당하던 실투마저 조선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낙마해서 그대로 전사해버렸고, 팔기들은 지휘 체계가 무너져 완전한 혼란 상태에 빠졌다. 부하 고마이가 "장수(실투)의 시신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이들을 저지하자, 호군교 부당커러가 도망치던 팔기 3명을 붙잡아 처형할 것, 실투의 시신을 찾을 것을 명령하였는데, 청군이 너무나 심한 혼란에 빠져 즉결처분 명령도 실행되지 않았고[19] 조선군의 반격을 계속 받은 끝에 결국 부당커러도 실투의 시신 회수를 포기하고 그대로 본영을 향해 퇴각해버렸다. 직후 다른 팔기들이 전진해 조선군에 맞섰는데, 이때 부당커러는 진격을 거부했을 정도로 공포증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추태 때문에 청측의 법관은 부당커러와 부하 바야라 병력 총 41명에게 채찍형과 귀와 코를 뚫는 형벌을 선고하였고 장교의 명을 거부한 병졸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의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또한 호군교 니칸, 퉁쟈산, 카타도 장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이후 홍타이지는 이들의 사형을 모두 면하게 해주고는 대신에 부당커러와 바야라 41명은 채찍형을, 니칸, 퉁쟈산, 카타, 순다리, 사무하투, 커피다에게도 사형에서 1등급 감하여 귀, 코를 꿰는 형과 채찍질만을 선고하였다.

이렇듯 청군 장수와 휘하 팔기 등 도합 수십명이 비겁 행위와 상관 시신 수습 명령 위반 등을 이유로 엄중히 처벌받았다는 것이 청측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종합해보면 청나라의 정예 기병 중 친위대만 가려 뽑은 바야라에서 추가적으로 인원을 가려 뽑아내서 돌격대를 선발해 맡겼는데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수인 조선군 부대의 공격 앞에 2번이나 패주하고 장수가 죽어 겁에 질린 것이다. 즉, 청실록에서 보이는 전투의 경과를 정리하자면 1번은 패주하고, 1번은 승리했으나 퇴각 중 공격당해 참패했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청측의 기록에는 이상한 점이 아주 많은데, 특히 승리해 유리한 거점을 차지한 실투에게 요토가 퇴각을 명한 것, 실투가 중도에 낙마해 전사했고, 용감하게 그의 시신 수습을 천명한 청의 최정예 부대가 시신이 수습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버티지 못하고) 빤스런을 쳤다는 기록은 쌍령 전투를 더 미스터리하게 만든다. 이러한 혼란상은 근왕군의 결집을 막기 위해 미리 북상 경로를 차단하려 준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전투 양상이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대규모의 적 병력이 집결되는 와중에 팔기 기병들을 몇천 단위로 쪼개서 산 중 길목마다 파견한 것을 보면 청군 입장에서도 어지간히 상황이 긴박했을 수 있다.[20] 다만 쌍령을 비롯해 당시 청군이 근왕군의 북상을 차단하기 위해 배치된 위치들은 하나같이 기병 전투에는 매우 부적합한 산지들이었고 돌격대는 기병대로 구성된 바야라에서 선발되었기에, 전투가 예상대로 잘 풀리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청실록에 전투가 치러진 곳의 지형이 수 차례나 언덕 위(岡上)로 강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병대 중심의 청 측에게 산지인 전장이 대단히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듯. 불리했던 전투 조건이나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던 청군의 혼란상을 감안한 것인지는 모르나, 청 태종은 적전도주와 전투 거부라는 중죄를 저지른 호군교들을 처형하라는 상주가 올라오자 처벌을 1등급 감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들을 참조.

토탈워 마이너 갤러리-쌍령전투의 기묘함

역사 카페 부흥-병자호란 청실록 47부

3.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과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3.1. 조선군의 병력 규모 추정

24분 50초부터 쌍령 전투 당시 조선군의 병력 규모에 관한 자세한 설명들이 나온다.

쌍령 전투에서 과연 조선군은 4만이었는가에 대한 고찰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2)-전투의 전개

단행본 수준으로 병자호란을 정밀하게 재구성한 유재성 선생의 ‘병자호란사’(1986)에서는 쌍령전투에 수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당시 경상도 총병력을 8000명으로 간주한후 좌우병사의 선봉부대를 2000명, 경상관찰사 심연의 본진 병력 규모를 6000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참전 조선군 4만명을 기준으로 전투를 바라보는 관점과는 기본 뼈대에서 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출처

쌍령 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병력 수가 3만~4만명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첫째, 당시 조선의 군사 체제에서 경상도 한 지역에서 단기간에 급히 모은 병력이 3~4만 명에 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 전장이 되었던 쌍령은 지형이 상당히 협소하여 3~4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진을 칠 수 있는 곳인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셋째,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쌍령 전투의 전개 내용을 보았을 때 도저히 그 정도의 대규모 전투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다른 도에서 동원된 근왕군 병력 수를 보면 대개 7,000~8,000명 정도로 파악된다. 유독 경상도에서만 다른 지역의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적의 소규모 병력 난입에 공황 상태에 빠져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 아무리 훈련이 되지 않은 병력이라 하더라도 3~4만에 달하는 군세였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3~4만 병력을 운운하는 내용이 조선시대 만들어진 여러 문헌들에 기재된 것은 분명하므로,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인된 기록이 아닌 이상 당시 사람들이 풍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부정확한 소문이 반복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출처
강도(江都)의 서리(書吏) 한여종(韓汝宗)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서 말을 전하였다.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5번째기사

이와 관련해 당시 실제 병력 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인조실록》을 보면 “경상 병사 민영이 어영군 8,000과 본도 병마를 이끌고 23일에 충주 수교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확인된다. 그런데 3~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설명하면서 ‘어영군 8,000명과 본도 병마’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또한 《숙종실록》을 보면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않고[險川之役 士卒死者 不下於雙嶺]……”라고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수사적 성격이 강한 문장이지만, 충청도 근왕병들이 패배한 험천 전투에서의 전사자가 쌍령 전투의 전사자와 그렇게 큰 격차가 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 인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실제 동원된 경상도 근왕군의 수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8,000명을 웃도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바이다. 게다가 후방에 머무르며 쌍령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병력과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었을 병력도 감안해야 하므로, 실제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 숫자는 수천 명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출처

그렇다면 쌍령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이 지휘한 군사가 3~4만 명이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전국에 근왕군을 보내라고 전교하였는데,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근왕군은 사실상 남한산성 근처까지 오지 못하였다. 병력의 일부라도 남한산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전투를 수행한 근왕군은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지역 근왕군뿐인데, 한 도의 근왕군 숫자가 8,000명 가량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벌인 4개 지역의 근왕군 수를 모두 합치면 3만 명을 웃돌게 된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가장 대표적인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쌍령 전투에서 이 병력 전부가 전몰된 것처럼 오도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하담파적록》에서 쌍령 전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를 한데 묶어서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서술한 점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3~4만 명이 실제로 동원된 숫자가 아니라 '동원되었어야 할 숫자'였을 가능성이다. 근왕병의 동원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 급하게 이루어졌기에 그 과정에서 군적에 따른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후 책임을 두려워한 각 지역의 수령 등 관련자들이 자신이 동원한 병력 수를 부풀려서 주장했을 수도 있다. 출처

3.2. 청군의 병력 규모 추정

쌍령전투 당시 화약 지급량과 전투경과

쌍령전투가 벌어진 1월 3일에 해당하는 청태종실록 권33 숭덕2년 1월3일조에 보면 "패륵 岳託이 전라도 심총병과 충청도 이총병의 군대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1월3일은 우리측 기록에서 쌍령전투가 발발한 날이므로 이 자료의 전라총병은 경상총병의 오류로 보이고 심총병이 바로 경상 감사 심연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태종실록 해당 날짜에 청군 병력 규모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만 패륵은 대충 6000~75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악탁(요토, 岳託)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수천명)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병력 수치는 추가적인 사료를 확인해 봐야할 것이다. 출처

남급본 <병자일기>를 보면 조선군이 쌍령에 도착한 시점부터 청군 척후가 조선군을 둘러 쌌는데 아군이 이를 몰랐다고 되어 있다. (賊之斥候已環於我軍而不知也) 척후가 이미 조선군을 둘러쌀 정도면 척후만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묘사된 상황 정도의 대규모 압사 사고를 일으킬 정도라면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착각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조선군이 포위되었다고 느낄 정도의 병력이라면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청군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훗날 허완의 사망 당시 상황을 < 승정원일기>가 묘사하면서 청군 수천 기 운운하는 기록이 남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당사자인 청측의 기록에서는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 그리고 패륵이 지휘하는 병력 수가 최대 6000~7500명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실제 청군의 병력 수는 3000명~7500명 수준으로 추정 할 수 있다.

4.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4.1. 4만 병력 패퇴설? (청군 300기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쌍령 전투 이후 무려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서 4만(?)에 달하는 조선군( 임용한 박사는 장부상 병력 4만에 실제 급하게 소집된 군대는 8천이고 이중 쌍령에 집결한 선발대가 2천이라 설명함)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 청나라 기병 300명이 당시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실제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의 전체 병력 수는 300명이 아닌 약 3,000명~7,500여명 정도로 추정이 된다. 심지어 당대 실록의 기록에서도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나라 팔기군의 숫자가 300기라고 기록되어 있지가 않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5일 을묘 1번째기사,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6일 병신 2번째기사) 즉, 청군 300기 설은 막상 당대 실록에서나 청나라 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우선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을 지휘했던 장수는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요토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인 『풍천록』에서, 쌍령 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 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요토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다. 요토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우리 나라에서의 인지도와는 달리 누르하치의 사실상 장남[21] 다이샨의 장남, 즉 누르하치의 손자로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이자 당시 팔기군 중 한 부대인 양홍기의 기주였으며, 훗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양홍기 기주를 세습하는 철모자왕작을 물려받았다. 당시 팔기의 기군 하나 당 책정된 병사가 만주 팔기의 경우 7500명이 상한이라는 점,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쌍령 전투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은 3000명은 넘겨도 최대치인 7500명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토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철군할 때 후방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또한, 지휘관이 요토 말고 1명 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화 전투에서 지휘를 했던 유림이 훗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쌍령 전투에 참전한 군관에게 그놈들 지휘관이 누구길래 우리 조선군은 왜 패퇴한 것이냐? 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군관은 "오곽사라는 자와 황족인 아이신기오로 요토입니다." 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요토 말고 오곽사라는 장수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2]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라며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신재호(필명) 씨 또한 이러한 논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으며,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들은 일일이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허완의 반대편 진영에 주둔했던 민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병사들이 불과 팔기군 300기의 돌격에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졌다는 내용 부터가 실록이 아닌 쌍령 전투로 부터 150년 뒤에 저술된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서 나오는 기록이다. 당대 실록의 기록에서도 청측의 기록에서도 민영을 무너뜨린 청군이 불과 팔기 300기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애초에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과 민영은 각각 집결한 조선군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쌍령 고개 양쪽에 진을 쳤는데, 그 중 민영이 이끌고 있던 수천 병졸들이 민영의 군 진영 내에서 다시 화약을 보충하려고 급히 서두르다가 그만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모두 폭발하는 바람에 결국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하는 틈을 타서 팔기군 300명이 그 틈을 노리고 돌격하여 허무하게 전멸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폭발 사고에 대한 기록 자체도 연려실기술에서 나오는 기록이지 당대 실록이나 청측의 기록들에서는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4.2. 지휘관 무능설?

정신적으로 잘 훈련되지 않고 머릿수만 불린 병사, 급히 출진하느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물자, 무능한 장수들의 형편없는 지휘와 갑작스레 일어난 화약 폭발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란 인식이 있으나, 막상 연려실기술에서의 악평과는 달리 지휘관이었던 허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깐깐한 그 이순신 장군에게도 능력을 인정받고[23] 유성룡에게도 천거를 받아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한 경험도 있던 베테랑 장수였었다.

위의 글에서도 적혀있듯이 허완이 3번 낙마했단 사실 자체가 전열이 붕괴되는 상황에도 지휘권을 유지하기 위해 낙마를 했음에도 말에 세번씩이나 다시 탔단 이야기며[24] 조총수들은 탄약과 화약을 부족하게 보급받은 것도 아니었다.[25]

속오군의 훈련도를 가지고 뭐라 그러는데 훈련도가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조선군 지휘관들이 몰랐던 것도 아니고 훈련도를 감안하지 않은 작전을 세웠다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 김화 전투도 속오군이 주축이 되어 이긴 전투였고, 훈련 수준이 낮지만 그래도 전의가 남아 있는 속오군을 어떻게든 추스려 그나마 사상자가 최소화되고 방어가 용이한 전장에 배치하고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니 비록 전투 직후 탄약이고 뭐고 다 떨어져 퇴각해야 하긴 했지만 우세한 청군을 적어도 한 번 막아낼 수는 있었다.

따라서 쌍령 전투의 가장 큰 패인은 연려실기술의 서술이 전부 다 사실이라고 가정 할 경우 허완의 무능한 지휘 탓인데 문제는 허완에 대한 연려실기술의 기록과 실제 당대 난중일기와 실록의 기록이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쌍령전투로 부터 150년 뒤에 저술된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이 겁쟁이라서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라고 온통 악평으로만 적혀 있지만
비국이 아뢰기를,

"허완(許完)이 쌍령(雙嶺)의 싸움에서 군사가 패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당초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행방불명이라고 했기 때문에, 포상하는 은전을 민영(閔栐)에게만 내렸습니다. 지금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말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민영의 예에 따라 포상하고 추증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비국에서 허완을 추증하기를 청하다

막상 실록에서는 허완이 분전하다가 스스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내용상 연려실기술의 기록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점을 볼 때 실제 상황은 조선군의 병력 자체가 청군보다 열세에[26]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청군의 기습을 받았고, 조총을 이용한 견제는 실패했으며, 그 뒤 백병전에서 나름 분전했으나 결국 허완의 부대는 다수의 사상자를 낸 채 지휘부가 전멸당하자 퇴각하고, 민영의 부대는 퇴각이 불가능해지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사실상 몰살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청사에서 기록된, 지휘관조차 전사할 만큼의 청군의 큰 피해는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민영의 조선군이 도주를 포기하고 끝까지 저항하자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속출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청 태종이 상관의 전사를 막지 못한 건 물론이고 시신조차 버리고 도망간 군인들 전원에게 사형을 면하고[27] 죄가 덜한 다수는 태형으로 끝내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도 생각보다 병력의 희생이 커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4.3. 여타 패인

허목이 지은 문집인 기언에 실린 허완의 비명과 1790년에 간행된 조선 후기대 학자인 황경원의 시문집 강한집에 실린 최진립의 전에 따르면 원래 조선군은 쌍령에 도착하면 진을 쳐서 아침밥을 먹은 후에 다시 행군할 계획이었으나,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종사관으로 있던 도경유가 날이 밝기도 전에 무조건 진군을 재촉한 것으로 나온다. 허완의 만류에도 도경유는 듣지않고 이에 반대한 경상우병사의 군관 박충겸의 목을 베며 진군을 독촉했다고 한다. 결국 조선군은 급하게 진군하느라 휴식이나 준비없이 청군을 바로 맞이하게 되었다. 실록에 실린 기록으로 보아 도경유가 진군을 재촉한 것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심연의 지시를 받고 벌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 항목에도 나오듯이 조선시대에는 관찰사와 병마사의 위계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명령체계가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나와있듯이 전투에서 포수들이 공명심에 취해 무분별하게 사격하여 청군에게 빈틈을 보인 것도 문제였다. 참고로 근대 영국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속사를 추구하면서도 전투 경험 많은 부사관에 따른 사격 통제를 극도로 중시하였는데, 바로 위에서 좌군이 무너지던 것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적군이 다가오면 사람은 공포심이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고, 일단 옆에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적군의 눈에서 흰자가 보이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참도록 훈련시켰으며, 부사관의 지시보다 앞서 방아쇠를 당긴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28]

사실 전열 보병 전술이 극대화되려면 가혹한 군기와 통제가 필수이다. 영국군의 전열보병 레드 코트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은 실탄 사격 훈련과 엄정한 군기였다. [29][30]

중앙군 최정예인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은 지휘관이 추태를 보여도 스스로 메우며 싸울 자질이 있었지만 속오군 포수들은 숙련도와 군기를 담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군기를 잡고, 사격을 통제할 하급 군관과 장교[31]들의 책임이 막중했는데, 임진왜란 때부터 병자호란 때까지 조선 중기 전쟁하는 내내 숫자가 부족해 고생했던 계급이다. [32] 수가 적은 만큼 숙련된 하급 지휘관 한 명 한 명이 중요했는데 전투 직전 아군 손에 목이 잘려나가고 교체되면 군기고 뭐고 없게 된다.

참고로 레드 코트들의 엄격한 군기는 엄중한 형벌에 기반했는데, 그 정도가 '확실하게 맞아 죽는 후퇴를 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을 지킨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똥군기나 가혹 행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떠한 행위에는 태형 몇 대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33] 이순신 장군 또한 해전에서 멋대로 포격을 감행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최소 참수형을 시행하였다. 군대에 있어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5. 기타



[1]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의 부장이 안동영장 선약해였다고 나와있지만, 순조 실록 32권(순조 31년 9월 1일 경술 1번째 기사)에 따르면 허완의 부장으로 참전해서 전사한 안동영장은 선세강이다. 선약해는 선세강의 11촌 조카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진도 군수 선의문의 아들이며 심양일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분은 경상 수군 절도사로 재직 중 병사했다. [2]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사야가 즉, 그 김충선이 맞다. 참고로 김충선은 이 전투에서 무려 청군 500기를 사살하였다. [3] 조선군을 향해 2차 돌격을 감행하다 입은 부상으로 본진으로 겨우 돌아온 뒤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낙마하여 전사하였다. [4] 1차 돌격 당시 조선군과의 전투도중 부상을 입고 본진으로 패퇴하였다. [5] 조선의 행정력이 우수한 편이었지만 임란 당시 20일에 걸쳐 동원한 4만의 병력을 고작 5일 만에 동원하기는 힘들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경상도 근왕군의 총병력이 8,000명이었고, 그 중에 2,000명의 선발대가 쌍령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이들이 전멸당하자 나머지가 조령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6]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 그리고 패륵은 대충 6000~75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므로 패륵 악탁(요토, 岳託)이 쌍령전투에 지휘한 청군의 병력 규모도 그 정도 수준(수천명)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7] 총 전사자가 2,600명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숫자가 아니라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의 숫자도합 2천 6백여 명이라는 기록이다. 험천과 강도에서의 전투 역시 처절했기 때문에 쌍령전투의 전사자만 특별히 수천에 달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충청 감사 정태화가 전사한 군사에 대한 처리를 치계하다 [8] 석이도(실투) [9] 청군은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속오군들이 동원되어 북상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걸 차단하기 위해 쌍령에 미리 주둔해 있던 것이지만, 쌍령은 속오군을 차단하기에 별로 적합한 곳이 아니었고, 지리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히 진을 첬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환경이었다. 근왕군 결집을 막지 못하면 남한산성 공략이 문제가 아니라 적지에서 그냥 앉아서 죽을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 듯 하다. [10] 실투는 아예 전사하였고 악다귀는 부상으로 인하여 본진으로 패퇴하였다. [11] 상관을 버리고 도망치는 비겁 행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아오신기오로 일족이 지휘중인 본대로 경상도 근왕군의 후속 부대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참사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이 전투 후 도망쳐온 팔기와 그 지휘관들은 매우 엄중하게 처벌받았다. [12] 다만 경상도 속오군만이 참가한 것은 아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가 험천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난 충청도 속오군이 합류해 싸웠다. 공식 편제대로라면 경상도 속오군은 총 2만 2448명, 1628년에 경상감사가 인조에게 보고한 병력은 2만 4천 명이었다. [13]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군사들 중 일부는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4] 당연하지만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의 병력 수도 전체 병력이라기보다는 돌격전을 펼친 기병들만의 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전체 병력 면에선 오히려 조선군이 청군보다도 더 적었을 공산이 크다. [15] 단, 연려실기술의 묘사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수 차례 격전 후에 생긴 PTSD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일 수도 있다. 이는 현대의 군인들도 흔히 겪는 일이고, 노령으로 인한 다른 신경정신과 질환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역사적 맹장이라고 해서 평생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야한다는 보장도 없다. [16] 정확히는 탄약 2냥이었다고 한다(남급본 병자일기 + 병자록의 기록). 현재 자동 소총으로 10발이면 연사 시 1초, 2초요 단발 조준 사격으로도 몇분 안되어 다 쓰기에 적은 양으로 느껴지지만 전근대 총으로는 제일 빠른게 20초에 한발이었고 적이 다가오기를 충분히 기다려서 쏘면 이후 또 쏠 기회가 많지 않기에 10발도 적은 수라 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 서양도 12사도(총기)라고 부르는 12발의 장전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한 전투에서 12발을 다 사용할 경우 매우 격렬한 전투를 했다고 평가하였으니 전장식 소총에서 10발은 그다지 적은 보급이 아니다. 이는 최전선 지휘관의 팀킬로 인한 사격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적을 사살하지도 못한 채 낭비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승전인 김화 전투에서 유림이 철저한 사격통제로 청군이 10보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일제 사격을 퍼부은 것과 크게 대비된다. [17] 만주족의 귀족 작위명으로, 서열 3위에 속한다. [18] 니루는 팔기군 제도에서 400명으로 편제된 기(구사)의 하위 부대이며, 호군은 이 전투에 출진한 정예병들 중 근위병 급인 바야라를 뜻한다. 구사는 25개 니루로 구성된 상급 제대이며 호군교는 바야라 중의 장교들이다. 즉 1니루당 1명씩의 친위대급 정예병을, 25니루로 편제된 1구사에서 2명씩의 장교를 추가로 받아 부대를 차렸다는 뜻이 된다. [19] 당사자들에 대한 군령은 본영에 와서야 집행되었고, 그나마도 홍타이지에 의해 감형되었다. [20]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는 순간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패배가 된다. [21] 다이산은 둘째고 첫째는 추옝이었는데 추옝은 누르하치와 사이가 나빠져서 숙청당했다. [22] 이 오곽사는 류림이 김화 전투에서 전사시킨 장수다. [23] 난중일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본인조차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순신 장군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장수는 손에 꼽는다. [24] 낙마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대충 2M 높이에서 불편한 갑옷과 무기를 찬 채로 등이나 머리부터 떨어지는 사고인지라 보통 운이 좋아야 중상, 심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기까지 하는 굉장히 위험한 사고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 씩이나 낙마하였음에도 다시 말에 오를 수 있었다는 건 보통 천운이 아니라는 얘기. [25] 단, 허완이 3번 낙마했다는 기록은 실록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고 연려실기술에서 나오는 기록이다. [26] 2,000여 명의 속오군이라면 청군 병력과 비교해서 3분의 1이 되지 않는데다 훈련도도 낮았으므로, 도경유의 책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청군에게 피해를 얼마나 주느냐가 관건이지 부대의 전멸을 면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27] 당시 동아시아 군대에서 상관의 죽음을 부하가 막지 못하거나 전사한 상관의 시신을 버리고 달아난 죄는 기본적으로 참수가 원칙이었다. 명군은 부대장이 죽으면 부대원 모두가 사형당했고, 조선군도 부대장이 전사하고 이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상관을 보호했음이 명백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직속 수하 군관들을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28] 물론 저렇게 근거리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쏜다는 건 관용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실제론 100미터가 넘어가는 거리에서도 사격전을 실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29] 당시 영국군에서 명령을 어긴 병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채찍형이 보통이었는데 문제는 이 당시 채찍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한가닥의 끈 따위가 아닌 여러 가닥이 있고 철조각들이 붙어있어 엄청난 고통을 주는 정말 악랄한 체벌도구였다. 특히 몇 대만 맞아도 살이 갈려 나가는 터라 50대 이상의 태형을 받으면 사실상 처형이었다. [30] 다만 머리 좀 돌아가는 병사들이나 고참병들은 전열을 지켜야 생존률이 올라간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알아서 전열을 잘 지켰다. 실제로도 머스킷 쏘던 시절엔 대포알을 전면으로 맞아 인명 피해를 받더라도 전열이 무너지지 않아야 떼지어 몰려오는 기병이나 보병을 상대로 학살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31] 조선시대에 지금의 장교에 해당하는 계급은 군관이라고 불렀고 부사관에 해당하는 하급 지휘관을 장교라 칭했다. [32] 이는 조선 초기 부사관 역할을 해야 하는 갑사들을 한 부대에 몰아넣고 일종의 정예부대로 만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전투능력이 뛰어난 갑사를 하나의 부대로 만들어서 일종의 정예부대로 굴릴 생각이었지만 부사관이 사라지면서 군대의 질이 떨어지고 갑사들도 군정이 문란해지면서 전투력이 떨어졌다. [33] 물론 프랑스 근위대처럼 자발적인 군기를 갖추는 전열 보병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당대 전열 보병들에게는 체벌을 통한 통제가 보다 일반적이었다. [34] 유죄인지 무죄인지 뚜렷하지 않은 사건 [35] 참고로 도경유의 형인 도응유는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을 일으켜 지휘했으며 정묘호란 때도 후금군에 맞서 의병과 관군을 이끌고 항전하는 등, 군 경험이 풍부한 장군인데 동생인 도경유는 형과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며 역사에 다시 없을 정신나간 짓을 저지른 멍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