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화를 남긴 해병대'는 대한민국 해병대의 ' 귀신 잡는 해병대', ' 무적해병'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표어·애칭 중 하나로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자리잡은 표어·애칭이다.2. 표기
' 귀신 잡는 해병대'와 더불어 '신화를 남긴 해병대'가 공식 표기이지만 '신화를 남긴 해병'으로도 많이 사용된다.해병대는 애칭이 생긴 이래 '신화를 남긴 해병대'를 공식 표기로 사용하였지만 해병대 관련 책, 언론 기사, SNS 콘텐츠 등등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도봉 전 해병대사령관 재임 시절인 1996년부터 이미 해병대에서 이런 경향을 바로잡기 위한 방침을 정했었고 그 일환으로 1997년에 해병대 용어의 역사적 근거와 법률적 의미 등의 내용을 정리한 자료집을 제작,각계에 배포하고 해병대전우회 등 전국 조직을 통해 용어 바로쓰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 #
당시 해병대에서 해병대 전체 구성원이나 조직을 뜻하는 `해병대(海兵隊)'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해병대의 병사 한명을 `해병(海兵)'의미하는 `해병'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먼저 '해병대'는 국군조직법상 법률적인 위상과 역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지만 `해병'은 해병대 구성원중 병사 한명을 뜻한다. 그러나 지난 1973년 10월 해병대가 해군으로 통폐합된 이후 1990년 8월 국군조직법에 따라 해병대의 설치 근거가 명시되기 전까지 24년간`해병대'란 용어는 사라지고 `해병'으로만 사용되면서 '귀신 잡는 해병', `해병 전우회', `해병 정신' 등의 잘못된 표현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모두 '해병'이 아닌 '해병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해병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브랜드화된 영어 번역 표현은 아직 없으며 1973년 UPI 통신사가 해병대사령부 해체를 알리는 뉴스를 서울발로 타전하여 마이애미 헤럴드 등 미국 신문에 10월 7일자로 실렸던 기사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을 'Legend Makers'로 번역한 사례가 있다.
참고로 '신화를 남긴 해병대'를 영어로 직역한 'Myth-Making Marines'는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어색한 영어 표현이다
왜냐하면 신화가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다!" 와 같은 관용구가 익숙한 국내와 다르게 영어권에서의 'myth'는 ' Greek mythology(그리스 신화)'와 같은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이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사실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즉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으로 관련해서 아래 외신기자 및 외신기사 명명설 문단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3. 유래
베트남 전쟁을 통해 널리 알려진 애칭은 확실하지만 언제 무슨 전투에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생겨난 애칭인지와 같은 구체적인 유래에 관하여 당대에 기록된 명확한 증거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3.1. 외신 종군기자 및 외신기사 명명설
해병대사령부에서 1999년 발간한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 등 해병대 공식 역사서에는 짜빈동 전투를 취재한 외신기자들이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표제하에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는 취지로 짤막하게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해병대에서 소개하는 공식적인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존재하며 국내 자생설이 실체적인 증거자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외신 종군기자 및 외신기사 명명설은 사실상 허위이다.
3.1.1.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표제하에 대서특필 했다는 외신기사들의 부존재
'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의 외신기사 유래설과 비슷하게 짜빈동 전투에서 대한민국 해병대의 전승(戰勝)과 전공(戰功) 및 전과(戰果)을 보도하는 외신기사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병대 공식 역사서에서 직접적인 유래로 설명하고 있는 '신화를 남긴 해병대'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영어 표현을 사용한 외신기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1967년 시점이면 6.25 전쟁 때와 달리 외신기사들이 보도하는 내용을 국내 언론들도 신속히 인지할 수 있었고 특히 베트남 전쟁 취재차 현지에 상주하던 한국인 종군기자들도 많았는데 네이버 옛날신문에서 조사를 해 보면 짜빈동 전투가 벌어졌던 1967년에 외신들이 승리를 격찬하며 '신화를 남긴 해병대'로 보도했다는 이런 기사는 존재하지 않고 해병대제2여단(청룡부대)이 베트남에서 철군을 완료한 시점인 1972년부터 이런 기사들이 존재한다.
특히 1973년 10월 해병대사령부 해체 예정을 알리는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기사의 경우는 똑같은 날짜에 비슷한 내용으로 게재된 것으로 보아 기자가 짜빈동 전투 당시 외신들의 취재과정을 경험하거나 외신의 기사원문을 확인하고 작성한 것이 아닌 해병대의 보도자료 성격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 '철벽같이 전초굳혀 청룡, 서부전선에 포진 마쳐' (1972년 2월 9일자) #
「귀신 잡는 해병」이란 호칭도「짜빈동」의 신화도 모두 외국신문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냐는 것.
조선일보 - '해병대 발자취' (1973년 9월 15일자)
#당시 짜빈동 혈전의 전황을 직접 취재하거나 전해들은 사이공의 4백여 외신기자들은 한결같이
「신화 같은 한국 해병의 전과」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경향신문 - '귀신 잡는 용맹…상승 24년 해체된 해병대의 발자취와 전승보' (1973년 9월 15일자)
#「신화 같은 한국 해병의 전과」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병대의 수많은 전역(戰役) 가운데서도 짜빈동 대첩은 세계전사에 기록될 쾌거였다.
67년 2월 15일 새벽 3시 야간기습을 감행해온 월맹정규군 2개연대 병력을 청룡 1개중대가 백병적으로 섬멸격퇴한
대첩은 당시 사이곤에 특파되었던 2백여 여 외신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신화 같은 전과라는 격찬을 받았다.
또한 해병대의
사관으로 불리울 정도로 해병대 역사 관련 수많은 저서를 저술한 정훈장교 출신 정채호 예비역 중령의 1981년 저서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 하권'(pp. 432~435)에
짜빈동 전투와 관련된 내외신 언론 보도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대단히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만 "외신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대'로 보도하여 현재의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애칭이 생겨났다." 이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67년 2월 15일 새벽 3시 야간기습을 감행해온 월맹정규군 2개연대 병력을 청룡 1개중대가 백병적으로 섬멸격퇴한
대첩은 당시 사이곤에 특파되었던 2백여 여 외신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신화 같은 전과라는 격찬을 받았다.
*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 하권', pp. 432~435, 저자 정채호 (1981년 1월 15일 발행)
두가지 逸話
끝으로 짜빈동전투가 간직하고 있는 두가지 일화를 소개해 둔다.
하나는 보도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식 부리핑 석상에서 터트려진 홍소(哄笑)를 자아내게 한
후일담에 관한 뒷얘기다.
먼저 보도에 관한 일화부터 소개한다. 짜빈동전투에서 시작한 바로 그날(十四일)낮이었다.
청룡부대에서는 十六일에 실시될 예정이던 한·미 ·월 합동의 거룡작전을 취재한 기자들을 초치하기 위해
우정[1] 추라이의 미 해병대 비행장에서 C-四七 수송기 한대를 빌려 정훈참모실 공보장교(정기인중위)를
불러 사이공으로 보내기까지 했던 것인데, 당시 사이공에 주재하고 있던 기자들은 대개가 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월남북부의 추라이지구 전선으로 가기를 꺼려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래서 정중위는 그 중요한 목적을 달성치 못한채 혼자서 쓸쓸히 돌아올 처지였으나 다행이도
오직 한 사람 조선일보사의 목사균기자만은 고등학교(용산고) 후배인 정중위의 간청도 간청이었지만,
스스로 용기를 내어 정중위를 따라 나섰던 것이 절호의 챤스가 되어 그날 밤 청룡부대 상황실에서
대기 중에 있던 그는, 그 이튿날 아침 청룡부대장과 함께 전투가 끝난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담한
생지옥을 기자로선 맨 먼저 목격했을 뿐 아니라 밤새도록 사투를 계속한 생존 장병들과의 직접적인 인터뷰로
값지고 생생한 전투담을 엮어냄으로써 짜빈동전투에 관한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생생한 보도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의 보도와 관련해서 청룡부대 정훈참모실 장병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조금은 언급해 두고자 한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 정훈참모 박경석소령은 공보장교(보좌관)와 카메라맨들을 총동원하여 그 끔직한 생지옥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기자들에게 배부할 준비를 갖추는 한편, 공보장교로 하여금 기사를 작성토록 하여
그것을 미군 우편비행기 편으로 사이공으로 급송, 이를 주월한국군사 보도실로 보내게 함으로써
국내 신문과 방송국에서 일제히 보도가 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다음은 공식 석상에서의 부리핑과 관련된 얘기들이다.
청룡부대 본부에서 있었던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에 대한 부리핑 얘기부터 먼저 하기로 한다.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급거 추라이로 비래했던 월남의 국가 원수와 수상에 대한 부리핑 석상에서
키 수상은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을 할 때 마구 치고 받고 하며 상대편의 갈빗대도 부러뜨린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때 작전참모 오윤진중령은 한국 해병대의 태권도 실력이 대단하여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인지와 중지를 펴 보이면서,
『이 두 손까락으로 눈알도 쑤셔 뽑지요...』하고 대답하여 두분을 놀라게 했고,
『그렇다면 육박전 때 많이 해치우는 태권도 선수들은 몇명이나 해치울 수 있느냐.』는 두번째 질문엔
『十五~六명 정도 거뜬히 해치울 수가 있읍니다.』고 답해 귀빈들을 경악케 했다.
그리고 두번째 부리핑은 주월 한국군사 보도실에서 마련된 외신기자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 부리핑에 참석하게 十一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한 외신기자가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고 물었을 때,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한국해병대만 못 하더라.』고 답하여 장내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고,
또 다른 기자는『한국해병은 육박전을 태권도로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때 정대위와 같이 참석했던 청룡부대 상황장교(이某대위)는 오윤진중령이 했던 것처럼 중지와 인지를
펴 보이고『이 두 손까락으로 눈을 쑤시면 눈알이 빠지지요...』하여 장내를 어리둥절케 했다.
그런데 이러한 답변은 다음과 같은 연쇄적인 반응(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즉 그 다음날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은 부리핑 장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그렇잖아도 한국군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주먹으로 친다고 하질 않고 눈알을 뺀다고 그랬느냐.』면서 부리핑은 잘 했으나
그 답변이 조금 지나친 것 같다고 하였고, 그 후 특별휴가를 얻어 모국을 방문했던 정대위가 강기천 사령관과
함께 김성은 국방장관을 배방했을 때는 그와 같은 얘기를 전해 들은 김장관이『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것 눈알이
아니고 불알이면 어때!』하며 오히려 답변을 잘 했다고 칭찬을 했다고 하니, 짜빈동전투는 이런 후일담으로 해서
더욱 인상이 깊은 전투로 기억될 것이다.
끝으로 짜빈동전투가 간직하고 있는 두가지 일화를 소개해 둔다.
하나는 보도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식 부리핑 석상에서 터트려진 홍소(哄笑)를 자아내게 한
후일담에 관한 뒷얘기다.
먼저 보도에 관한 일화부터 소개한다. 짜빈동전투에서 시작한 바로 그날(十四일)낮이었다.
청룡부대에서는 十六일에 실시될 예정이던 한·미 ·월 합동의 거룡작전을 취재한 기자들을 초치하기 위해
우정[1] 추라이의 미 해병대 비행장에서 C-四七 수송기 한대를 빌려 정훈참모실 공보장교(정기인중위)를
불러 사이공으로 보내기까지 했던 것인데, 당시 사이공에 주재하고 있던 기자들은 대개가 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월남북부의 추라이지구 전선으로 가기를 꺼려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래서 정중위는 그 중요한 목적을 달성치 못한채 혼자서 쓸쓸히 돌아올 처지였으나 다행이도
오직 한 사람 조선일보사의 목사균기자만은 고등학교(용산고) 후배인 정중위의 간청도 간청이었지만,
스스로 용기를 내어 정중위를 따라 나섰던 것이 절호의 챤스가 되어 그날 밤 청룡부대 상황실에서
대기 중에 있던 그는, 그 이튿날 아침 청룡부대장과 함께 전투가 끝난 현장으로 달려가 그 참담한
생지옥을 기자로선 맨 먼저 목격했을 뿐 아니라 밤새도록 사투를 계속한 생존 장병들과의 직접적인 인터뷰로
값지고 생생한 전투담을 엮어냄으로써 짜빈동전투에 관한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생생한 보도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의 보도와 관련해서 청룡부대 정훈참모실 장병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조금은 언급해 두고자 한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 정훈참모 박경석소령은 공보장교(보좌관)와 카메라맨들을 총동원하여 그 끔직한 생지옥의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기자들에게 배부할 준비를 갖추는 한편, 공보장교로 하여금 기사를 작성토록 하여
그것을 미군 우편비행기 편으로 사이공으로 급송, 이를 주월한국군사 보도실로 보내게 함으로써
국내 신문과 방송국에서 일제히 보도가 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다음은 공식 석상에서의 부리핑과 관련된 얘기들이다.
청룡부대 본부에서 있었던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에 대한 부리핑 얘기부터 먼저 하기로 한다.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급거 추라이로 비래했던 월남의 국가 원수와 수상에 대한 부리핑 석상에서
키 수상은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을 할 때 마구 치고 받고 하며 상대편의 갈빗대도 부러뜨린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때 작전참모 오윤진중령은 한국 해병대의 태권도 실력이 대단하여
그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인지와 중지를 펴 보이면서,
『이 두 손까락으로 눈알도 쑤셔 뽑지요...』하고 대답하여 두분을 놀라게 했고,
『그렇다면 육박전 때 많이 해치우는 태권도 선수들은 몇명이나 해치울 수 있느냐.』는 두번째 질문엔
『十五~六명 정도 거뜬히 해치울 수가 있읍니다.』고 답해 귀빈들을 경악케 했다.
그리고 두번째 부리핑은 주월 한국군사 보도실에서 마련된 외신기자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 부리핑에 참석하게 十一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한 외신기자가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고 물었을 때,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한국해병대만 못 하더라.』고 답하여 장내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고,
또 다른 기자는『한국해병은 육박전을 태권도로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이때 정대위와 같이 참석했던 청룡부대 상황장교(이某대위)는 오윤진중령이 했던 것처럼 중지와 인지를
펴 보이고『이 두 손까락으로 눈을 쑤시면 눈알이 빠지지요...』하여 장내를 어리둥절케 했다.
그런데 이러한 답변은 다음과 같은 연쇄적인 반응(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즉 그 다음날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은 부리핑 장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그렇잖아도 한국군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주먹으로 친다고 하질 않고 눈알을 뺀다고 그랬느냐.』면서 부리핑은 잘 했으나
그 답변이 조금 지나친 것 같다고 하였고, 그 후 특별휴가를 얻어 모국을 방문했던 정대위가 강기천 사령관과
함께 김성은 국방장관을 배방했을 때는 그와 같은 얘기를 전해 들은 김장관이『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것 눈알이
아니고 불알이면 어때!』하며 오히려 답변을 잘 했다고 칭찬을 했다고 하니, 짜빈동전투는 이런 후일담으로 해서
더욱 인상이 깊은 전투로 기억될 것이다.
3.1.2. 위대한 공적을 비유하는 '신화를 남긴 XX' 등은 영어에 존재하지 않는 관용구
표기 문단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신화가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 "월드컵 4강 신화를 쓰다!" 와 같은 관용구가 익숙한 국내와 다르게 영어권에서의 'myth'는 ' Greek mythology(그리스 신화)'와 같은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 이외에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사실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 즉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관련 국방군 무오설의 영어 위키백과 문서 제목이 'Myth of the clean Wehrmacht'이고 도시전설 등을 검증하는 미국의 예능 프로그램 제목이 'buster(파괴자)'를 결합한 Mythbusters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헤럴드 경제 - '귀신잡는 해병대’ 60년…신화는 계속된다 (2009년 4월 15일자) #
이 승리는 외국 언론들에 ‘The Myth-making Marine’(신화를 남긴 해병)이라는 내용으로 보도돼
영광스런 해병대의 또 다른 수식어가 됐다.
중앙일보 - 베트남전 ‘짜빈동 전투' 영웅 정경진 예비역 중령 (2015년 10월 15일자)
#영광스런 해병대의 또 다른 수식어가 됐다.
UPI통신은 한국 해병대가‘신화(Mythological story)'를 만들었다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더 가디언 - Holocaust a myth, says Iranian president (2005년 12월 15일자)
#Iran's president said today that the Holocaust was a "myth",
prompting strong condemnation from Israel, Germany and the European Commission.
위의 국내 언론사 기사들과 영국
더 가디언 기사에서 'myth'의 용례를 보면 알겠지만 결국 위와 같은 국내 언론사 기사들은 실제
짜빈동 전투 당시 외신의 실제 기사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채 '신화를 남긴 해병대'가 외신기사에서 유래했다는 해병대 공식 역사서 등을 보고 이를 토대로 기자들이 추측해서 영어 번역을 한 것으로 영어권 화자에게 'Myth-making Marine'은 '괴담을 퍼뜨리는 해병대', 'Mythological story'는 '근거없는 헛소문'이라는 의미로 전해지면서
짜빈동 전투에서의 대한민국 해병대의 전과가 근거가 없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외신기사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리는 만무하다.prompting strong condemnation from Israel, Germany and the European Commission.
이것도 낭설로 판명되기는 했지만 ' 귀신 잡는 해병대' 애칭이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표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처럼 차라리 짜빈동 전투 후 외신기사에서 'myth'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The Epic Performance of Korean Marines' 이런 문구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이다.
3.1.3. 직접적인 유래로 잘못 소개된 Myth-Making Marines' 제목의 사진
해병대 출신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종상 선임연구원은 2023년 발간한 개인 저서 '귀신도 모를 해병대 이야기'에서 'Korea's Myth-Making Marines' 문구가 제목으로 기재된 아래의 사진이 '신화를 남긴 해병대'의 직접적인 유래가 되는 사진이며 이 사진은 짜빈동 전투가 벌어졌던 1967년 2월 15일 미국 UPI 통신사를 통해 미국에 타전되었던 사진이라고 소개하였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은 절대로 1967년 2월 15일 미국 UPI 통신사를 통해 미국에 타전되었던 사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문구가 새겨지지 않은 순수 원본 사진 자체는 해병대원이 M1 개런드 소총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토대로 1965년 10월부터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해병대 청룡부대에 M16 소총이 처음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가 1967년 4월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 대략 이 사이 기간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Korea's Myth-Making Marines' 제목 아래의 "The Blue Dragon Marine Brigade's service in Vietnam earned it a legendary repuataion by Lieutenant Colonel James F. Durand, U.S. Marine Corps" 문구에 등장하는 Lieutenant Colonel James F. Durand 즉 제임스 F. 듀란드 중령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해병대 중령이 아니고 한국해전 학과를 수료하고 한미 특별연락장교 등으로 2000년대에 활동한 한국통 미국 해병대 중령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듀란드 중령이 작성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6.25 전쟁 활약상 소개문이 2004년에 미국 해병대 커뮤니티(leatherneck.com)에 게시된 적이 있었고 # 역시 듀란드 중령이 작성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베트남 전쟁 활약상 소개문이 2018년 historynet.com에 게재되었는에 이 소개문의 제목 역시 'Korea's Myth-Making Marines'이었으며 #전역 후 2011년 '연평도 포격 1주기' 해병대, 발전 심포지엄에도 참석한 적이 있다. #
- 2004년 시점 듀란드 중령 프로필
LtCol Durand is an intelligence officer who served for five years in Korea, including assignments
with the Special U.S. Liaison Advisor, Korea and U.S. Marine Corps Forces, Korea.
He graduated from Marine Corps Course, Korean Naval War College
in 1998 and currently is a student at the Defense Language Institute. He will attend Japan's
National Institute for Defense Studies next year.
정리하자면 2000년대에 활동한 듀란드 중령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해당 사진은 1967년 2월 15일 미국
UPI 통신사를 통해 미국에 타전되었던 사진일 수가 없으며 실제 사진의 정체는 미국 해병대 듀란드 중령이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대한민국 해병대 애칭을 소개하기 위해 대략 2000년대에 베트남 전쟁의 한국 해병대원 사진에 문구를 넣어 제작한 사진으로 추정된다.with the Special U.S. Liaison Advisor, Korea and U.S. Marine Corps Forces, Korea.
He graduated from Marine Corps Course, Korean Naval War College
in 1998 and currently is a student at the Defense Language Institute. He will attend Japan's
National Institute for Defense Studies next year.
3.2. 국내 자생설
위의 영화 포스터 #가 증명하듯이 '신화를 남긴 해병'은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이 1965년 10월 파월되기 전에 이미 국내에서 1965년 1월 개봉된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1967년 2월 14일에 벌어진 짜빈동 전투 보다 대략 2년이나 빠르다.
또한 짜빈동 전투가 벌어졌던 1967년 2월 14일 이전 이미 투이호아 지구의 베트콩 토벌 작전인 '해풍 작전' 당시 1개 분대를 이끌고 동굴 수색 중 전사한 이인호 소령 관련 기사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 등의 표현이 신문기사에서 사용되었다.
동아일보 - '고 이인호 소령 영결식 엄수' (1966년 8월 31일자) #
해병의 신화를 남기고 국립묘지에 영면
신화를 남긴 해병 고 이인호 소령은 31일 국립묘지에 고이 잠들었다.
경향신문 - '고 이 소령 말없는 개선' (1966년 8월 29일자)
#신화를 남긴 해병 고 이인호 소령은 31일 국립묘지에 고이 잠들었다.
유족들의 흐느낌 속에 해병의 신화를 만든 고 이인호소령은 29일 그리던 고국땅에 돌아왔다.
경향신문 - '군과 전우와 영웅동상과' (1967년 2월 11일자)
#해사출신으로 해병의 신화를 낳은 고 이소령의 동상을 맡은 조각가는 홍대교수 조각과장인 김정숙 여사.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다음과 같이 위대한 전공(戰功) 등을 비유하는 '신화를 남긴 XX' 등의 수식어가 1967년 2월의 짜빈동 전투 이후 해병대 혹은 해병대원만이 독점하는 그런 표현이 절대 아니었다는 점이다.
경향신문 - '강재구 소령 육군장' (1965년 10월 8일자) #
한국군의 영원한 신화를 만든 고 강재구 육군 소령은 8일 전 국군 장병의
마음속에 불멸의 용사로 아로새겨지며 동작동 그의 유택에 영면했다.
경향신문 - '1965년 그 사건과 그 사람 (9) 의로운 죽음' (1965년 12월 10일자)
#마음속에 불멸의 용사로 아로새겨지며 동작동 그의 유택에 영면했다.
신화 남긴 강재구 소령
강 소령의 죽음은 한국군에 신화를 만들었다.
동아일보 - '월남……「(맹호)」 2제(題)「퀴논」에서' (1966년 3월 26일자)
#강 소령의 죽음은 한국군에 신화를 만들었다.
재구부대는 월남에서 또 다른 신화를 남겼다.
매일경제 - '새 신화 남긴 맹호 툭코전 기갑9중대 표창' (1968년 10월 5일자)
#월남전 사상 새로운 신화로 남게된 「툭코작전」의 주인공인
맹호기갑연대 9중대는 지난 6일 미국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
맹호기갑연대 9중대는 지난 6일 미국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
결국 영화의 영향인지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신화를 남긴 해병' 혹은 '신화를 남긴 해병대'가 1965년부터 해병대제2여단(청룡부대) 등 해병대에서 아직 공식적인 표어·애칭급은 아니지만 별칭으로 자리잡아 가는 중이었고 국내 언론사에도 짜빈동 전투 이전부터 해병대원 및 해병대 포함하여 베트남 전쟁에서의 국군 장병 혹은 국군 부대들의 위대한 전공(戰功)을 설명할 때 '신화'라는 단어를 연계한 표현이 이미 유행이었던 상태였다.
정리하자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해병대의 베트남 전쟁 짜빈동 전투 등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어느 순간 해병대에서 '신화를 남긴 해병대'가 공식적인 표어·애칭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4. 참고 문헌
-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 하권 - 정채호 예비역 해병대 중령 (1981)
- 해병대 전통과 비화 - 정채호 예비역 해병대 중령 (2010)
- 귀신도 모를 해병대 이야기 - 박종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2023)
5. 관련 문서
[1]
일부러의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