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북쪽의 시계탑 (간타 가르)
무함마드 이크발 저택
시알코트 성채
1. 개요
우르두어 سيالكوٹ영어 Sialkot
파키스탄 펀자브주의 도시. 라호르에서 북쪽으로 90km, 구지란왈라에서 동북쪽으로 40km, 잠무에서 서남쪽으로 30km, 구지라트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체납 강과 라비 강 사이의 평원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66만명으로, 파키스탄에서 13번째로 큰 도시이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파괴한, 고대 마드라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의 수도였던 사갈라 (상갈라)가 이곳으로 추정된다.
비록 중세 시기에는 라호르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쇠퇴했지만, 무굴 제국과 영국의 지배 하에 산업 도시로 부흥하였다. 인근 구지란왈라 및 구지라트와 함께 수출 주도 산업 지역인 황금 삼각 지대를 이루며, 세계 축구공의 절반 가량을 생산한다. 시알코트의 1인당 GDP는 무려 18,500 달러 (2021년 기준)로 파키스탄 내에서 최고 수준이다. 주요 출신 인물로는 사상가 무함마드 이크발이 있다. 서북쪽 10km 지점에 시알코트 국제공항이 있다.
2. 역사
시알코트 성채의 잔존 성벽
마하바라타에는 사칼라 (साकला)로 언급되고, 기원전 6세기경 마드라 왕국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3세는 카타에이 족의 거점 사갈라를 함락한 후 본보기로 도시를 파괴하고 8만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 상갈라 공방전) 이후 도시는 헬라식으로 재건되어 상갈라 (Σάγγαλα)라 불렀고, 기원전 150년경 인도-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1세는 시르캅 ( 탁실라)에서 상갈라로 천도하였다. 메난드로스 대왕의 치세에 상갈라는 비단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무역 거점으로 번영하였고, 이러한 번영상은 메난드로스의 불교 개종이 담긴 밀린다경에 잘 드러난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상갈라는 에티메디아 (Εύθυμέδεια)로 기록되었다. 인도-그리스 왕국과 이어진 인도-스키타이 왕국, 쿠샨 왕조, 굽타 왕조 시절 상업과 불교가 융성하던 상갈라는 탁실라와 함께 서북 인도의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던 460년 에프탈 (백훈족)이 탁실라를 함락하자 그 지배층이 피신해왔는데, 상갈라 역시 곧 함락되었다. 515년경 에프탈 국왕 토라마나는 상갈라를 수도로 삼았다. 토라나마의 아들 미히라쿨라의 치세에 전성기를 누린 에프탈은 528년 말와 국왕 야쇼댜르만이 이끄는 연합군에 패배하여 중앙아시아로 축출되었다.
2.1. 중세
시가지 남부 아이크 강변에 위치한 이맘 알리 울 학크 영묘
탁실라의 파괴 후 상갈라는 고중세 시기 펀자브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6세기 중반 설립된 타안크 왕국 역시 상갈라를 수도로 삼았다. 633년 도시를 방문한 구법승 현장은 지명을 셰켈로라 기록하며 당대의 시가지는 알렉산드로스가 파괴한 도시에서 약 4km 가량 떨어진 곳에 재건된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643년 잠무의 라자가 도시를 점령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지명은 상갈라에서 시알코트로 점차 변화하였고, 9세기 무렵 힌두 샤히의 영토가 되었다. 970년경 사이드이맘 알리 울 학크가 힌두쿠시를 넘어 펀잡으로 진격했으나 시알코트 전투에서 라자 사한 팔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가즈니 술탄 사북테긴은 980년 시알코트를 함락하고 도시와 성벽을 파괴,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로써 시알코트는 라호르에게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한편 펀잡의 첫 무슬림 순교자인 알리 울 학크는 이후 성인으로 추앙되었고, 북인도의 이슬람화에 초석이 되었다.
11세기 초엽 힌두 샤히는 술탄 마흐무드에게 라호르를 상실한 후 시알코트로 천도하였다. 다만 얼마후 시알코트 역시 가즈니 제국령이 되었고, 현지 코카르 부족들은 잠무의 라자에게 내던 연공을 중단하였다. 1185년 라호르 점령에 실패한 무함마드 고리는 시알코트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여 성채를 대대적으로 보강하고 후세인 추르말리 휘하의 수비대를 두었다. 이후 그가 가즈니로 돌아가자 라호르의 가즈나 술탄 호스로 말리크와 코카르 부족이 시알코트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고, 이어진 라호르 공방전 끝에 1186년 항복하며 가즈니 제국은 멸망하였다. 1206년 무함마드 고리가 사망한 후 구르 제국은 가즈니의 섭정 얄두즈와 라호르의 아이바크로 나뉘었고, 양측의 경계점에 위치했던 시알코트는 얄두즈의 영토가 되었으나 1217년 일투트미쉬가 점령하여 델리 술탄 왕조령이 되었다. 1223년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 딘 밍부르누가 일대를 점령했으나 곧 일투트미쉬에게 축출되었다.
델리술탄국 시절 시알코트에는 수피 선교사들이 유입되어 현지 힌두 주민들 중 다수를 무슬림으로 개종시켰고, 이로써 시알코트는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 14세기 말엽 델리 술탄국이 쇠퇴하자 코카르 부족이 일대를 접수하였고, 티무르에 맞섰다. 1414년 그 지도자 샤이카 코카르가 시알코트를 점령했으나 얼마후 피살되었고, 도시는 로디 왕조령이 되었다. 술탄 발룰은 코카르 격파를 도운 잠무의 라자 비람 데브에게 시알코트를 영지로 주었고, 반세기 가량 이어진 안정기 동안 시알코트의 인구는 크게 늘었다. 1480년 카슈미르 왕국 (샤 미르 왕조)의 장군이자 잠무의 군벌 말리크 타지 바트가 라호르 총독 타타르 칸을 격파하고 비어 있던 시알코트를 점령하였다. 이후 말리크 타지는 수차례 라호르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1487년 시알코트에서 사망하였다. 1520년 바부르의 1차 델리 원정 당시 부관 우스만 가지 레자가 시알코트를 점령하였다.[1]
2.2. 무굴 제국기
구루 나나크와 함자 가우스의 만남을 기념하는 구르드와라 베리 사힙
무굴 제국 시기 시알코트는 라호르 주 (수바흐)에 속하였다. 시크교의 창시자 구루 나나크는 시알코트를 종종 방문하였고, 수피 성인 함자 가우스와 만나기도 하였다. 악바르 대제의 치세에 시알코트 총독 (자기르)으로 봉해진 라자 만 싱은 성채를 보수하고 경제를 활성화시켜 인구 증가에 기여하였다. 1586년 카슈미르 왕국의 내전에서 패배한 유수프 샤가 시알코트로 망명하였으나, 이내 악바르에 의해 델리로 소환된 후 유배되었다. 3년 후 카슈미르는 무굴 제국에 병합되었고, 이로써 시알코트는 북방의 위협을 덜게 되었고, 카슈미르에서 이주해온 제지공들 덕에 무굴 하리리 종이[2]의 생산지가 되었다. 종이와 함께 대장장이들의 무기 제조도 활성화되며 시알코트는 일찍이부터 산업 도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2.3. 근대
18세기 중반 시알코트는 카카이자이 & 셰르와니 파슈툰 가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명목상으로 무굴 조에 복속한 잠무의 란지트 데오 간는 시알코트 점령 시도가 실패하자 1748년 두라니 왕조에 복속하였고, 결국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인도 원정 중 점령하였다. 아흐마드 샤의 철수 후 시크교 공국인 반기 미슬이 시알코트를 노렸고, 마침내 1786년 도시를 점령하였다. 도시는 4개의 구역으로 분할되어 각각 사르다르 지완 싱, 나타 싱, 사히브 싱, 모하르 싱이 통치하였다. 그중 후자는 전란으로 흩어진 주민들을 귀환시켰다. 구지란왈라의 수케르차키아 미슬과 대립하던 반기 미슬은 시알코트를 잃었고, 1791년 수케르차키아의 마하 싱에게 정복되었다. 마하 싱의 후계자이자 시크 왕국의 초대 마하라자 란지트 싱은 1808년 사르다르 지완 싱으로부터 시알코트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란지트의 사후 1849년 2월 구지라트 전투 후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하였다.2.4. 현대
영국이 주도한 인도 분할론으로 인해 파키스탄국 수립안이 상정된 다음날인 1946년 6월 24일부터 펀자브에서는 힌두 & 시크교도와 무슬림 간의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다만 라호르, 암리차르, 루디아나, 라왈핀디에서 폭동이 벌어지는 수개월 동안 시알코트에서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다만 인도의 무슬림 난민들이 모여들자 힌두/시크교 주민들은 인도 방면으로 이주하기 위해 도시 외곽의 평원에 집결하였고, 무슬림 주민 중 일부도 도시 밖으로 나와 기존 이웃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본래 북쪽의 잠무로 향하던 힌두/시크 난민들은 카슈미르 분쟁으로 길이 막히자 라호르를 경유하여 인도령으로 향하였다. 펀자브 일대의 혼란과 대대적인 인구 교환은 시알코트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경제의 주축이던 시크교도의 이탈로 산업의 80%가 버려지거나 파괴되었고, 전체 자산의 90%가 증발하였다. 동시에 잠무를 중심으로 유립된 20만의 무슬림 난민들 역시 숙제였다.신생 파키스탄의 펀자브 정부는 방치된 자산을 난민들에게 분배하고 각종 건설 사업을 추진하며 시알코트 경제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60년대에는 다른 도시들과 이어지는 도로 건설이 활발하였다. 다만 인도와의 국경에서 불과 10km 가량 떨어져 있기에 양국 간의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시알코트는 전방 도시로써 긴장감이 감돌았다. 1965년의 인도-카슈미르 전쟁 당시 파키스탄 군의 카슈미르 진군에 대한 보복으로 인도군은 시알코트를 공격하였고, 이에 주민들은 민병대를 구성하여 군대와 함께 도시를 지켜내었다. 그해 9월 시알코트 동남쪽 15km 지점의 평원에서 벌어진 차윈다 전투는 65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격돌로, 인도군은 260대의 전차 중 100여대를 잃었다. 이듬해 파키스탄 정부는 시알코트에 힐랄 이스타클랄 깃발을 내려주며 라호르, 사르고다와 함께 일종의 영웅도시로 지정하였다. 지금도 매년 국방의 날에 해당 깃발을 게양하는 행사가 벌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