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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16:09:01

탁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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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0년

모헨조다로 고고 유적
موئن جو دڑو اصلی نام (موہانڑوجودڑو) یعنی موہانڑو قوم کا ٹیلہ وادی سندھ کا سب سے پرانا قبیلہ میں آثار قدیمہ کے کھنڈر
1980년

탁실라
ٹیکسلا
1980년

타흐티바히의 불교 유적과
사리바롤의 도시 유적
تخت بھائی کے بدھ کھنڈر اور قربی شہر سیری بہلول کی باقیات
1981년

라호르 성과 샬리마르 정원
قلعہ لاہور اور شالامار باغ
1981년

타타의 역사 기념물
مکلی کا قبرستان, ٹھٹہ
1997년

로타스 요새
قلعہ روہتا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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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키스탄 탁실라.jpg
랜드마크인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17.jpg
시르캄 유적의 그리스식 장방형 도시 구조
파일:탁실라 사원 파키스탄.jpg
자울리안 불교 사원 유구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탁실라
영어·프랑스어 Taxila
국가·위치 파키스탄 펀자브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0년
등재기준 (iii)[1], (vi)[]
지정번호 139
파일:간다라..jpg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5.jpg
탁실라 출토 불상들. 간다라 양식의 대표작들로, 좌측의 단식하는 부처가 유명하다

1. 개요2. 역사
2.1. 불교 & 헬레니즘 융합 문화2.2. 알촌 훈족(Alchon huns)의 침공과 쇠퇴
3. 갤러리
3.1. 시르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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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르두어 ٹيکسلا
산스크리트어 तक्षशिला
그리스어 Τάξιλα
영어 Taxila

파키스탄 펀자브 주 북부의 고대 유적. 수도 이슬라마바드 라왈핀디 광역권에서 서북쪽으로 15km 가량 떨어져 있다. 인더스 강 유역에 있어 모헨조다로 하라파가 상고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라면, 탁실라는 고대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기원전 4세기 경부터 간다라 지방의 중심이었고, 인도-그리스 왕국 인도-스키타이 등의 수도로써 헬레니즘 문명과 불교 문화가 함께 융화되어 발전한 다국적인 도시였다. 동시에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인도를 잇는 실크로도 도시로써 활발한 교역으로 번영하였고 특히 날란다 대학과 함께 고대 불교의 양대 교육 기관인 탁실라 대학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서기 6세기 에프탈의 침공과 불교 박해로 쇠퇴하였고, 중세 들어 폐허로 남았다가 20세기 초에 발굴되었다. 현대에는 옛 유적의 서쪽에 인구 9만의 현대 도시가 들어섰다. 과거 마우리아 왕조 시기 왕의 길을 포장한 대간선도로 (Grand Trunk Road)와 철도로 수도 광역권 및 페샤와르와 이어져 있고, 이슬라마바드를 들른 여행객들이 종종 방문한다. 유적지의 주요부인 3대 도시 유적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의 비르 마운드, 기원전 2세기 무렵의 시르캅, 서기 1세기 무렵의 시르수크가 남쪽에 북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 외에 서기 2세기에 세워진 자울리안 사원과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등이 있다.

2. 역사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2.jpg
첫 도시 유적인 비르 마운드

기원전 3000년경 인더스 문명기에 마을이 있었으나 아리아인의 침공 이후 버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1000년 경에 인더스 강의 지류인 하로 강의 남안과 서부 히말라야 산맥의 기슭에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졌다. 본래 산스크리트어로 돌의 도시란 의미인 탁샤실라로 불렸는데, 이를 그리스식으로 발음한 탁실라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상고 시대부터 번영했던 도시는 역사 서술의 전초 격인 설화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인도의 대표적인 서사시인 마하바라타는 대부분 바이샴파야나와 자나메자야 왕 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해당 대화는 자나메자야가 탁실라에서 뱀 희생제를 치를 때에 바이샴파야나가 처음으로 읊었다고 한다. 라마야나에서는 탁실라가 라마의 동생 바라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하며, 고대 불교 설화인 자타카에서는 간다라 왕국의 수도로 기록되었다.[3] 일대는 기원전 515년 다리우스 1세의 인더스 원정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군이 당도하자 탁실라의 군왕 옴피스 (암비)는 그에 복속하고 함께 포루스와 싸웠다. 원정군의 그리스인 사가들은 탁실라가 부유하고, 풍족하며, 안정된 도시라고 기록하였다. 아리아노스는 대왕이 그곳을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고, 희생 제의를 치른 후 각종 운동 경기를 열었다고 전한다. 대왕의 사후 기원전 317년 그가 임명했던 그리스인 총독은 축출되었고, 탁실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정복되어 마우리아 왕조령 간다라의 주도가 되었다. 찬드라굽타의 스승 카우틸랴 (차나캬)가 탁실라 대학에서 강의했다고도 한다. 그후 아소카 대왕의 불교 진흥책으로 탁실라는 불교 도시가 되었고, 이때부터 탁실라 대학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마우리야 시기 탁실라는 박트리아 ~ 페샤와르에서 수도 파탈리푸트라 ( 파트나)까지 이어지는 '왕의 길'이 지나는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광장과 하수 처리 시설 등을 갖춘 계획도시였다.

2.1. 불교 & 헬레니즘 융합 문화

파일:파키스탄 탁실라 13.jpg
두번째, 그리스식 유적인 시르캄

기원전 2세기 마우리야 조가 쇠퇴하자 탁실라는 박트리아에 기반한 인도-그리스 왕국에게 점령되어 한세기 반만에 재차 그리스 영향력 하에 들었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존 수도이던 카피사 (바그람)에서 탁실라로 천도하였고, 기존 시가지이던 탐라날라 (하로 강의 지류) 서안의 비르 마운드 대신 동안에 신도시인 시르캅을 세웠다. 그리스식 장방형 시가지를 갖춘 시르캅은 메난드로스 대왕의 불교 진흥책에 따라 헬레니즘-불교 문화가 혼재한 다문화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다만 메난드로스의 사후 인도-그리스 왕국 역시 쇠퇴하였고, 기원전 90년경 대월지에게 밀려난 샤카족에게 패하여 탁시라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밀려났다. 남겨진 탁실라는 기원전 20년경 샤카족이 세운 인도-스키타이의 초대 군주 곤도파레스에게 점령되었고, 시르캅은 이번에는 인도-스키타이의 수도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사도 도마 ( 토마스)가 탁실라를 방문하여 전도했다고 한다.

서기 50년 경에는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그리스 철학자인 티야나의 아폴로니우스가 방문하였고, 3세기에 그의 전기를 저술한 필로스타라투스는 탁실라가 장방형의 요새화된 도시이고 니네베와 비슷한 규모라고 묘사하였다. 한편 서기 1세기 후반 탁실라는 짧은 파르티아 지배기를 거쳐 쿠샨 왕조의 창건자 쿠줄라 카드피세스에게 점령되었다. 그후 카니슈카 대왕은 시르캅 대신 다시 탐라날라 서안에 신도시 시르수크를 세웠다. 쿠샨 시대에도 탁실라는 카피사, 페샤와르, 마투라와 함께 그 수도들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3세기 들어 사산 왕조의 공세로 쿠샨 조는 약화되었고, 4세기 중반 인도 토착 세력인 굽타 왕조가 일대를 정복하였다. 굽타 시대에도 탁실라는 비단, 목재, 말, 목화, 은제품, 진주, 향료 등을 거래하는 교역 도시로 번영하였다. 이 시기 탁실라는 변경의 군사 도시이자 무역 도시임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융성하였고, 인도 고전 문학에 종종 등장하였다.

2.2. 알촌 훈족(Alchon huns)의 침공과 쇠퇴

파일:파키스탄 탁실라 1.jpg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4.jpg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6.jpg
모흐라 모라두 내부의 스투파. 일종의 부도로 추정 피플란의 보살상

서기 400년경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 구법승 법현은 탁실라가 '잘린 머리'라는 뜻으로, 석가가 자신의 머리를 공양한 곳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번창하던 탁실라는 450년경 키다라족의 침공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비록 얼마 후 굽타 조의 스칸다굽타가 일대를 수복했지만 이미 파괴된 탁실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였다. 특히 사산-에프탈 전쟁으로 인한 실크로드 무역의 단절과 유목민들의 지속적인 습격은 경제적 쇠퇴를 야기하였다. 결정적으로 470년경 이번에는 알촌 훈족이 간다라와 펀자브를 침공하여 대대적인 파괴를 불러왔고, 5백년 넘게 이어지던 탁실라 대학을 포함한 불교 사원들이 파괴되었다. 6세기 들어 굽타 조가 쇠락하자 일대는 에프탈의 영토가 되었는데, 힌두교의 시바 신앙에 빠져있던 그 국왕 미히라쿨라는 탁시라를 포함한 서북 인도의 불교 시설들을 파괴하였다. 이로써 불교는 한때 본거지나 다름없던 간다라-펀자브 지역에서 쇠퇴하였다.

7세기 인도를 여향한 현장법사는 630년 탁실라에 이르러 도시가 반쯤 폐허가 되었고 소수의 승려만이 잔존하며, 현지 부족장들이 카피사에 이어 카슈미르에 복속한 채로 내분을 벌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9세기 들어 일대는 카불 샤히의 지배를 받았고, 왕조가 튀르크계에서 힌두계로 교체된 후 가즈니 왕조에게 정복되었다. 1004년 술탄 마흐무드는 폐허가 된 탁실라를 거쳐 물탄 원정에 나섰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각종 다신교 의식에도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하자 환멸을 느끼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알 우사이판 왕이 탁실라에 기반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쨋든 11세기 이후 기억 속에서 사라진 탁실라는 1863-64년 옛 기록대로 추적한 커닝햄에 의해 재발견되어 1913년부터 10여년간 영국 조사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3. 갤러리

파일:파키스탄 탁실라 2.jpg
유적지 지도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14.jpg

파일:파키스탄 탁실라 14.jpg
시르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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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탁실라 파키스탄 3.jpg
비르 마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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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흐라 모라두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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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흘라르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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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라지카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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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보살상 유구

3.1. 시르캄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1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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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탁실라 파키스탄 8.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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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신전 유적

파일:탁실라 파키스탄 7.jpg
자이나교 사원 유적

파일:파키스탄 탁실라 유적.jpg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3] 하지만 실제 간다라 왕국의 수도는 푸쉬칼라바타 (현재의 마르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