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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1:07:58

시문용

1. 개요2. 행적

1. 개요

시문용(施文用, 1572년 ~ 1623년)은  명나라 병부시랑을 지낸 시윤제(施允濟)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유격장군(遊擊將軍) 남방위(藍方威)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참전했던 무장이다. 호는 고국에서 따온 명촌(明村).

2. 행적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부상으로 인해 명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경상도 성주에 정착하였다.[1] 시문용이 조선에 정착하면서 국내 절강 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정인홍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의 주선으로 사촌 누이인 합천군의 장함의 딸과 혼인하여 자식들을 두었다. 인조반정 이후에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전 의금부 도사 양홍주가 조카를 억지로 외국인에게 시집보냈다고 정인홍을 탄핵하기도 했다. 반면 선조실록에는 정인홍이 강제로 시집을 보낸 것은 황당한 무고라고 반박하면서 그저 정인홍이 절강사람들을 동향인으로 잘 대우한 것일 뿐이며, 장함의 일가붙이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강제 결혼이 웬말이냐고 반박하는 의령진사 오여온의 상소가 수록되어 있다.

시문용은 땅을 잘 보는 것으로 천거되어 선조로부터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풍수지리에 능했기 때문에 광해군이 큰 관심을 보여 성주에 살고 있던 그를 한성으로 자주 불러 의견을 물었다. 후손들은 그가 광해군의 군사개혁에 참여했다고 주장하나 시문용이 명나라 병사 출신인 것은 사실이지만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시문용의 행적은 모두 공사에 관련된 것이다. 광해군 7년에 광해군이 시문용을 등용한 이유부터가 시문용이 지리를 잘 안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며, 이때 정인홍의 질녀 혹은 사촌누이와 결혼시키고 궁궐터를 잡는 사업을 맡겼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 달아나 숨었으나 체포되어 같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공사담당자 성지, 김일룡, 복동 등과 함께 모두 참수되었다.

그리고 영조실록엔 별 얘기가 없으나 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가 시문용을 복권해주고 병조참판에 추증하였으며 천역에서 면제해주었다. 이후 정조 17년에 정조가 이 일을 거론하면서 시문용의 후손들을 불러서 만나보고 시문용의 6대손 시유영과 7대손 시한익에게 식량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급료를 주며 활쏘기를 권장하며 조상처럼 무관이 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은 시문용이 죽지 않고 성주로 돌아와 저술활동을 하여 병학기정, 감여지남, 의복묘결 등을 저술하였고 1654년에 천수를 누리다 생을 마감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이 터무니없는 행장 등으로 조상을 높이는 일은 아주 흔한 일임으로 그다지 믿을 것은 되지 못한다.

시문용의 후손 절강 시씨들은 서학의 후손 절강 서씨들과 함께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절강 시씨들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보월리 맏질마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 꽃질마을로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현재 대명마을에는 절강 서씨들만 거주하고 있다.[2] 현재 성주군 용암면 대명마을에는 두 장수가 고국 명나라를 기리기 위해 매달 초하루에 사배를 올린 재단인 대명단이 남아 있으며 두 장수를 추모하기 위해 1834년(순조 34) 유림에서 건립한 풍천채도 남아 있다.


[1] 이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조선에 남은 인물이 친구인 서학이다. 서학 역시 성주에 정착하여 국내 절강 서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2] 대명(大明)이라는 마을 이름이 이들의 고향인 명나라를 뜻하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