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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5:10:08

스테판 오스토야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장.png
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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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6D7585> 코트로마니치 왕조
<rowcolor=#6D758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트브르트코 1세 스테판 다비샤 옐레나 그루바 스테판 오스토야 트브르트코 2세
<rowcolor=#6D7585> 복위 제6대 복위 반왕 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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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4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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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오스토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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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jepan Ostoja}}}
출생 미상
사망 1418년 9월 (향년 불명)
보스니아 왕국
재위 보스니아 국왕
1398년 ~ 1404년
보스니아 국왕 (복위)
1409년 ~ 1418년
아버지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
형제 트브르트코 1세?, 부크 코트로마니치?
배우자 비타카, 쿠자바 라데노비치, 옐레나 네립치치
자녀 스테판 오스토이치, 라디보이 오스토이치, 스테판 토마시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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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4대 국왕.

2. 생애

기원은 기록상에서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트브르트코 1세, 부크 코트로마니치 형제의 아버지인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의 사생아라고 보지만 불분명하다. 1398년 5월 옐레나 그루바 여왕이 대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뒤, 보스니아 대공 흐르보예 부크치치 흐르바티니치 등의 추대로 보스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는 권력을 잡은 직후 헝가리 왕위를 놓고 지기스문트에 맞서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같은 해에 보스니아를 공격하려고 계획했지만, 내전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터라 중단했다.

1400년, 오스토야는 라구사 공화국이 보스니아인들을 노예로 판 것에 대해 항의하고, 이를 명분삼아 라구사 공화국과 짧은 전쟁을 벌였다. 일부 학자들은 가톨릭 신자를 노예로 파는 게 엄격히 금지되었기에, 라구사 공화국이 판 보스니아인은 보고밀파이고, 오스토야 역시 보고밀파였을 거라 추정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를 지원한 흐르보예 부크치치 흐르바티니치가 보고밀파에 호의적인 건 분명하다. 1403년, 라디슬라오는 자다르에서 헝가리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흐르보예를 헝가리,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토야는 흐르보예의 보호를 받던 한 귀족의 땅을 압수했고, 이로 인해 흐르보예의 반감을 샀다. 또한 오스토야는 또다른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와도 갈등을 벌였다.

1404년 4월 말, 흐르보예와 산달리는 오스토야가 소집한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해 5월, 두 사람은 군대를 일으켜 오스토야를 축출하고 트브르트코 2세를 새로운 보스니아 국왕으로 옹립했다. 오스토야는 보스니아의 수도 보보비츠에서 헝가리로 피신한 뒤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고,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지기스문트는 즉시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1404년 6월, 헝가리군은 우소라와 보보비츠를 공략했다. 하지만 모든 보스니아 귀족은 트브르트코 2세를 왕으로 인정했기에 전쟁은 지속되었다. 1408년 9월, 지기스문트는 도보르 인근에서 보스니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트브르트코 2세는 1409년 초 보스니아에서 여전히 왕을 칭하며 라구사 공화국과 서신을 교환했지만, 헝가리의 강한 압력에 굴복한 보스니아 귀족들이 오스트야 편으로 돌아서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409년 말 해외로 망명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국왕에 복위했지만, 오스토야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가신들은 그에게 불순종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했으며, 흐르보예는 아예 오스토야 대신 지기스문트에게 직접 복종했다. 반면 코사차 등 특정 귀족들은 오스토야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하면서도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1410년까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오스토야는 흐르보예를 어떻게든 견제하기 위해 흐르보예나 그의 가신에게 속한 땅을 다른 귀족에게 주려 했으며, 라디슬라오를 지지하는 코사차 등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이에 지기스문트는 그에 대한 후원을 끊고 흐르보예와 함께 오스토야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1410년, 헝가리군이 지기스문트의 지시에 따라 보스니아로 진군해 브란두크, 스레브레니크, 스레브레니차를 포함한 보스니아 북동부를 공략했다. 뒤이어 비소코까지 넘어가자, 오스토야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지기스문트는 한때 보스니아 국왕으로 즉위하려 했지만, 그를 돕던 흐르보예가 반대하자 포기했다. 1410년 또는 1411년 겨울, 오스토야는 다코보로 찾아가서 지기스문트와 접견한 뒤 그를 자신의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헝가리 점령하에 있던 우소라와 솔라를 헝가리의 영역으로 인정했다. 지기스문트는 그 대가로 그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했다.

1414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자기들에게 망명한 트브르트코 2세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복위하기 위해 보스니아 침공을 단행해 여러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대다수 귀족들이 오스토야를 계속 지지하자, 오스만군은 점령지에 트브르트코 2세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1415년, 지기스문트는 동료 보스니아 귀족인 산달지 흐라니치를 무단으로 공격한 흐르보예에게 화가 나 그와 갈등을 벌인 끝에 흐르보야.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를 몰수했다. 이에 흐르보예는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군이 출격해 라슈바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트브르트코 2세를 무시하고 오스토야를 왕으로 인정한 뒤 돌아갔다.

1415년 8월, 오스토야는 지난날 오스만군이 쳐들어왔을 때 오스만군에 굴복하여 트브르트코 2세를 받들었던 처남 파블레 라디노비치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스토야는 파블레를 장남 페타르와 함께 크랄예바 수체스카 인근의 보스니아 의회에 초대했다. 그들이 그곳으로 향했을 때, 오스토야와 산달지 및 측근들이 두 사람을 습격해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사로잡았다. 그 직후, 오스토야는 파블레의 여동생이자 자기 아내였던 쿠야바와 이혼했다.

1416년, 흐르보예가 사망했다. 그러자 오스토야는 즉시 흐르보예의 미망인 옐레나 네립치치와 재혼해 상당한 영토를 지참금 형식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1세는 그가 이대로 강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메흐메트 1세는 오스토야를 반대하는 회의를 소집한 뒤, 산달지, 라디슬라프 파블로비치[1] 및 오스토야의 유일한 적출자인 스테판 오스토이치를 불러들었다. 오스토야는 이 회의에서 파블레 라디노비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메흐메트 1세는 코사차와 라디노비치 가문이 이 문제를 계기로 서로 갈등을 벌이도록 유도해 보스니아의 단결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오스토야는 이렇듯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1418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바보비츠의 왕릉에 안장되었다. 사후 적출자인 스테판 오슽토이치가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1] 파블레 라디노비치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