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숭의종합경기장은 인천문학경기장이 문을 연 2001년 이전까지 인천 유일의 종합 운동장으로[1] 인천지역 스포츠의 메카 역할을 했다.2. 주경기장
1999년 제80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이 열린 인천공설운동장 | 2008년 인천축구전용경기장 기공식 당시 |
1983년 제64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
숭의종합경기장의 이전 명칭은 인천공설운동장이며 이 운동장이 최초 조성된 것은 193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근대 스포츠 역사의 중요한 터전이자 인천의 첫 종합경기장으로 알려진 자유공원 기슭 웃터골 터에 1934년 인천부립중학교가 세워지자 인천부가 4만원의 예산을 들여 웃터골 운동장을 대체할 경기장을 현재의 숭의동 부지에 마련했다. 이 당시 육상장, 야구장, 정구장 등이 세워졌다. 과거 언론 보도 기록을 통해 남아있는 인천공설운동장의 개장기념 체육행사 시점은 1936년 8월 2일이다.
인천공설운동장이 철거 직전까지의 모습과 유사하게 조성된 것은 1955년 즈음이다. 이 당시 인천체육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정용복 씨 등이 미군으로부터 원조 받은 드럼통을 활용해 운동장 담장을 쌓기 시작했고 1960년대 초반에 이 작업을 마무리했다. 1960년대 초반에 비로소 종합운동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고 이 운동장에서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가 치러졌다. 이후에도 이 경기장에서 1978년(제59회), 1983년(제64회)[2], 1999년(제90회) 등 세 차례의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주경기장에서는 인천을 연고로 삼았던 현대 호랑이 축구단과 유공 코끼리 축구단 등 K리그 팀들의 경기가 종종 치러졌고 현대나 유공이 아닌 다른 팀들의 중립 홈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현대의 경우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인천·경기지역을 연고지로 삼았고 유공은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경기·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서울을 뺀 인천·경기지역을 연고지로 삼았다. 그러나 프로야구와 달리 이 당시 프로축구단의 연고지는 그저 명목상 연고지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지역 순회 형태로 경기를 치르던 시절이었다. 프로축구에 연고지 정착이 제대로 이뤄진 시점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으나[3] 연고지 정착 이후 시점에는 인천 연고 프로축구단이 없었다.
인천공설운동장은 2002년 인천문학경기장이 문을 연 이후부터는 이용 빈도가 확연히 떨어졌다. 특히 1999년 전국체전 이후에는 전국 규모의 체육행사가 치러진 바가 없다. 다만 2004년 인천 유나이티드 FC 창단 이후 K리그 경기가 열리기는 했는데 2005년 아시아 육상 선수권 대회 개최지로 선정된 인천문학경기장에 트랙을 설치해야 하는 공사로 인해[4] 2004년 시즌의 일부 홈경기를 인천문학경기장 보조경기장과 이곳에서 나눠 치렀다. 그 시즌을 빼면 아예 용도폐기 수준으로 전락했다.
결국 2008년 숭의운동장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주경기장, 야구장, 체육회관 등이 일제히 철거되고 축구전용경기장이 신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른 경기장이 철거된 이후 숭의종합경기장 지역에 유이하게 남은 체육시설은 주경기장 서쪽 언덕에 지어진 인천도원체육관과 인천시립도원수영장 뿐이다.
참고로 이 경기장의 방향은 다른 종합경기장과 달랐던 것이 특징이다. 보통 '피치'라고 부르는 잔디 그라운드는 남북 방향의 세로로 설계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경기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피치가 동서 방향으로 설계돼있다. 이 경기장과 비슷한 방향으로 지어진 종합경기장이 하나 더 있는데 숭의운동장과 비슷한 시기에 공설운동장이 된 부산 구덕운동장이다. 이 때문에 대낮에 경기가 열릴 경우 관중 다수가 앉는 본부석 맞은편 좌석의 관중은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으며 경기를 관전해야 했다.
아울러 바로 뒤편의 야구장은 조명탑이 있었지만 주경기장은 조명탑이 없었다. 정확히는 주경기장 본부석 지붕에 야간 조명 시설이 있기는 했지만 피치 전체를 비출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야간경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인천 유나이티드가 2004년 이 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쓸 당시 야간경기는 조명시설이 갖춰진 문학 보조경기장에서 치렀고 낮경기만 숭의운동장에서 치렀다.
3. 야구장
자세한 내용은 숭의야구장 문서 참고하십시오.축구전용경기장 피치 부지의 북쪽 부분에는 숭의야구장이 있었는데 1982년부터 2001년까지 인천 연고팀의 홈구장으로 사용됐다.
[1]
축구와 육상이 가능한 주경기장, 야구 경기가 가능한 야구장, 실내 경기가 가능한 체육관, 수영 경기가 가능한 수영장이 한 동네에 다 있었다. 다만 주경기장과 야구장이 붙어있고 그 건너편 언덕에 체육관과 수영장이 있어 단일 종합경기장으로 보기에는 살짝 무리가 있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주경기장과 야구장은 헐렸다.
[2]
체전 기간 도중이던
10월 9일에
버마
랭군에서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이 대회의 폐회식은 체전에 대한 결산 자리가 아니라 '북괴 만행 규탄 체육인 궐기대회'라는 살벌한 이름의 행사로 진행됐다.
[3]
1996년까지도 프로축구의 지역 순회 경기는 이어졌는데
정명원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 기록이 쓰여졌던 1996년 10월 20일에도 이 경기장에서는
부산 대우 로얄즈와
전북 현대 다이노스의 경기가 열렸다. 문제는 야구장과 거의 붙어있는 N석 쪽으로는 관중들이
축구는 보지 않고 담장에 매달려
해태 타이거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한국시리즈 4차전 경기를 봤다는 웃픈 일화다.
[4]
문학경기장 개장 당시에는 트랙이 없었다. 대신 트랙 자리에 잔디와 같은 색깔의 인조잔디를 깔고
2002년 월드컵을 치렀다. 비슷한 형태의 경기장이
광주월드컵경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