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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3 14:25:20

수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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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 무함마드 마숨 샤 바크리 영묘 사틴 조 아스탄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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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두어 سكھر
신드어 سکر
영어 Sukkur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근대2.3. 근현대
3. 갤러리
3.1. 사틴 조 아스탄3.2. 마숨 샤 영묘3.3. 바카르 성채3.4. 사트 벨로3.5. 기타

1. 개요

파키스탄 신드주의 도시. 하이데라바드에서 동북쪽으로 200km, 물탄에서 서남쪽으로 300km 떨어진 인더스 강 서안에 위치한다. 신드 주에서 카라치와 하이데라바드에 이은 제3의 도시로, 인구는 약 60만인데 강 건너편 로흐리 등의 광역권은 백만이 넘는다. 지명은 아랍어로 설탕을 뜻하는 슈카르에서 유래되었다. 시가지는 인더스 강과 암로티 마시드 키타 운하, 라이스 운하, 다두 운하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신드 지역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수쿠르 일대에는 유적이 즐비하다. 서안에는 라칸조다로와 마숨샤 영묘가 있고 강에는 부쿠르 성채, 사드 벨로 힌두 사원, 영국 지배기에 세워진 댐과 랜스다운 대교가 있다. 동안의 로흐리에는 일명 17자매묘라 알려진 사틴 조 아스탄 묘원과 아로르 유적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과 함께 시가지 북부에는 공단이 있고, 수쿠르 IBA 대학이 있다. 그 운하 서쪽에는 수쿠르 (베굼 누스라트 부토) 공항이 자리하며, 로흐리에는 아로르 대학이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순니 무슬림이나 비교적 힌두에 우호적인 신드 지방의 특성상 여전히 4%의 힌두교도가 남아있다. 특히 힌두 성지인 사드 벨로에서는 매년 바바 반칸디의 기일을 전후로 3일 간 축제가 열리며, 인도-파키스탄에서 수천의 순례객들이 방문한다. 현재까지도 사드 벨로는 이주민 기탁 재산 재단에서 관리한다. 2010년 파키스탄 대홍수 당시 시가지 대부분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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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르 유적

인더스 강 중하류의 좋은 입지 덕에 인더스 문명기부터 서남쪽으로 60km 떨어진 모헨조다로와 함께 번영한 도시인 라칸조다로가 있었다. 아리아인의 남하 후 두 도시는 모두 버려졌다가, 현재 수쿠르의 인더스 동안에 알로르 (اروهڙ)가 세워졌다. 굽타 왕조가 붕괴한 후 신드 지방에 세워진 라이 왕조와 브라흐만 왕조는 모두 알로르를 중심으로 삼았고, 711년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후에는 신드 주의 주도가 되었다. 다만 8세기 후반 남쪽의 신도시 만수라에 주도권을 넘겨준 후 아로르는 962년 강의 진로가 바뀌는 홍수를 겪으며 쇠락하였다.

2.1.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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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르 성채의 근대 묘사도

아로르의 쇠락 후 강변에 로흐리 (روهڙي)가 세워져 13세기 들어 하항으로 번영하였고, 사이드 ( 무함마드의 후손) 무함마드 빈 슈자 앗 딘 알 막키가 정착하며 신드 북부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후자가 당도한 시점이 아침이라 하여 일대는 아랍어로 아침이란 의미인 바크르로 알려졌고, 그의 후손들은 바크리 사이드라 불리게 되었다. 16세기 바크르 혹은 부쿠르 섬은 반세기 가량 신드를 지배한 아르군 왕조의 수도였다.

그후 무굴 제국에 들어 일대의 사탕수수 농업에 바탕을 둔 수쿠르로 명명되었다. 현지 출신의 학자 사이드 니자뭇딘 미르 무함마드 마숨 샤는 악바르 대제의 장군으로써 퀘타 발루치스탄 원정 등에 종군하였고, 그 대가로 1598년 수쿠르의 나와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607년 마숨 샤는 현 도시인 서안 지역에 자신의 영묘와 26m 높이의 미나렛을 건립하였다. 이후 영묘에는 그와 그 자손들이 매장되었고, 현재까지도 마숨 가문이 관리 중이다. 비슷한 시기 로흐리의 강변에는 미르 아불 카심 남킨의 묘원인 사틴 조 아스탄이 세워졌다.

2.2.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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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세워진 사드 벨로 (سادھ بھيلو). 내부의 힌두 경전 역시 신드어로 쓰여있을 정도로 현지화되어 있다.

1823년에는 힌두 수도승 바바 반칸디 마하라지가 메나크 파르바트 섬에 정착하여 안나푸르마, 하누만, 가네샤 등의 신전을 세웠다. 이후 사드 벨로라 불린 섬은 신드 지방의 대표적인 힌두 성지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한편 8세기 아랍 군대가 버리고 간 씨앗에서 자랐다고 전해지는 대추야자 숲으로 둘러싸인 로흐리 건너편의 작은 도시였던 수쿠르는 1839년 영국군의 기지가 되며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비록 1845년 군사기지는 이전되었지만 그후로도 교역의 거점으로 이어졌고, 1862년 시로 승격되었다. 1889년에는 인더스 강에 놓인 첫 다리 중 하나인 랜스다운 교가 세워져 로흐리와 이어졌고, 육로 교통을 크게 개선하였다. 교각이 아닌 현수교처럼 두 철탑 사이에 놓인 랜드다운 교는 당대의 최신 기술이 적용된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2.3.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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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영국의 건축물 중 걸작으로 여겨지는 랜스다운 대교

1932년에는 만연한 범람을 조절하기 위해 9년의 공사 끝에 장장 1.5km 길이로 세계 최대의 관개 시설 중 하나인 수쿠르 보가 세워졌다. 동시에 7개의 수로가 세워져 인근 1000만 에이커의 농지에 물을 공급하게 되었고, 일대의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한편 1923년 수쿠르의 자이나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헤무 칼라니는 신드 지방의 반영 투쟁에 참가하여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군의 이동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철로 훼손을 기도했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는 인도 독립 운동에 있어 최연소 순교자였다. 1947년 독립 당시 수쿠르는 이미 인구 10만의 대도시였다. 독립 후 반힌두 폭동이 벌어진 펀자브 벵골과 달리 신드 지방에서는 학살 피해자가 500명 이하로 저조한 편이었다. 수쿠르의 힌두교도들 역시 1948년 1월 카라치의 반시크 폭동 후에야 인도로 이주하였고, 대신 인도에서 온 무슬림 피난민들이 정착하였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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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쿠르 보와 시가지 일대. 좌측이 수쿠르, 우측이 로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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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쿠르 보 (과거 롤리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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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흐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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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쿠르의 3대 관개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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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배기에 세워진 세인트 메리 교회

3.1. 사틴 조 아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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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마숨 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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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바카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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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사트 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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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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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쿠르 기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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