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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지


남제 추존 · 비정통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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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 추존 황제
소승지 | 蕭承之
출생 384년
동진 남개릉군 개릉현
(現 장쑤성 창저우시)
사망 447년 (향년 63세)
남제 남난릉군 난릉현
(現 장쑤성 창저우시)
능묘 영안릉(永安陵)
재위기간 유송 진흥현오등남
연대 미상 ~ 4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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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본관 난릉 소씨
승지(承之)
부친 태상부군 소악자(蕭樂子)
배우자 선효황후
사백(嗣伯)
작호 진흥현오등남(晉興縣五等男)
시호 선황제(宣皇帝)
}}}}}}}}} ||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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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유송 시기의 인물로 소악자(蕭樂子)의 아들이자, 남제의 초대 황제인 고제 소도성의 부친이었다. 자는 사백(嗣伯)이었고, 동진 남개릉군 개릉현(蓋陵縣) 출신이었다.

2. 생애

처음 건위부(建威府)에서 참군을 지냈고 의희 연간에 초종이 평정된 뒤 양무장군(揚武將軍), 안고문산2군(安固汶山二郡)의 태수로 옮겼다. 원가 연간에 위열장군(威烈將軍), 제남군(濟南郡) 태수로 옮겼다.

430년, 소승지는 유송 문제 유의륭의 명령으로 우장군 도언지와 함께 북위를 정벌하는 북벌에 참여했으나 대패했다. 북위군이 승세를 몰아 청주를 함락시키고 숙손건이 제남군으로 침공해오자, 소승지는 공성계를 이용하여 북위군을 물리쳤다.

431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단도제가 수장(壽張)에서 연전하다가 회군하고 활대(滑臺)가 북위에게 함락된 뒤 연주자사(兗州刺史) 축영수(竺靈秀)가 조정으로부터 처벌되었다. 문제는 소승지가 제남을 보전한 공적을 인정하여 소승지를 연주자사로 삼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고 이후 중병참군(中兵參軍),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하였다.

433년, 한중태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정에 돌아온 소승지는 둔기교위로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소승지가 저족을 평정한 공을 인정하여 소승지를 청주자사로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승지는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팽성왕 유의강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사도 강하왕 유의공의 중병참군, 용양장군(龍驤將軍), 남태산태수로 전임되었으며, 진흥현오등남(晉興縣五等男)에 봉해지고 식읍 3,400호를 받았다.

이후 우군장군으로 승진했고 447년에 사망했다. 양주의 백성들은 아공산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소승지를 기렸다. 478년 산기상시(散騎常侍),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되었다. 훗날 아들인 소도성이 황제에 올라 남제를 건국한 뒤 시호를 '선황제'(宣皇帝)로 하고 능호를 영안릉(永安陵)으로 하였다. 대신 묘호는 올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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