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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9:23:17

이치카와 4인가족 살인사건

세키 테루히코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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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범인 세키 테루히코(関 光彦)에 대해3. 범죄 행각4. 검거5. 재판6. 여담7. 유사 사건

1. 개요

市川一家4人殺人事件

파일:171219jnn.jpg [1]

1992년 3월 5일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에서 일가족 4인이 세키 테루히코(関 光彦)[2]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3]

2. 범인 세키 테루히코(関 光彦)에 대해

세키 테루히코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버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량하고 질이 나쁜 테루히코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1973년 세키 테루히코를 낳았다. 테루히코는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YMCA의 시설에서 수영을 배우고 이후에도 야구와 가라데 등을 수련하여 운동능력 하나는 발군이었지만 테루히코의 아버지는 후에 본성을 드러내고 매일 어린 테루히코와 그의 어머니를 폭행했다.[4] 그것이 지속되어 테루히코는 유년 내내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게 되었다.

테루히코의 부모는 결국 이혼했다. 이혼 과정도 순탄치 않았는데 아버지가 노름과 술에 빠져 빚쟁이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야쿠자에게 쫓기게 되었고 가족들을 책임지기는커녕 곧 야반도주를 감행했으며 외할아버지는 딸의 가족의 빚을 혼자 짊어지고 딸과 절연해 버렸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테루히코는 외할아버지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야반도주 이전만 해도 가정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외할아버지를 존경했으며 여호와의 증인에 심취했고 아버지가 성경을 찢어 버리자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하였으나 정작 복수가 생판 남인 조폭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던 외할아버지가 절연해 버리자 원한을 품게 되었다.

테루히코는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하면서 세상은 돈으로서 이루어져 있다는 가치관이 자리잡혔고 사춘기 때 몸이 건장해져 따돌림에서 벗어나자 불량배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에 각종 일탈 생활을 하면서 방탕하게 살았으며 자라서는 아버지와 똑같이 가정폭력을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남동생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때릴 정도로 포악하게 변모했고 고등학교 2학년에 들어서는 학교를 자퇴하고 외할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이마저도 6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고 골목에서 마주쳐 시비를 걸어 오는 불량배들을 일방적으로 구타하여 금품을 갈취[5]했고 그것도 모자라 돈이 부족해지자 가게의 돈을 훔치기도 했다. 이를 목격한 외할아버지는 테루히코를 야단쳤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테루히코는 자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발로 차서 실명에 이르게 했다. 이때부터 테루히코는 눈에 보이는 여자들을 강간하고 강도 짓을 일삼기 시작했다고 한다. 18살 때는 풍속점에서 일하던 21살의 필리핀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으나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드는 성욕을 견디지 못한 아내는 3개월 만에 도망치고 말았다.

3. 범죄 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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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세키 테루히코의 중학교 재학시절 모습
테루히코는 1992년 2월 8일 필리핀인 호스티스를 납치한 뒤 이틀 동안 감금하고 강간했다. 이 호스티스는 이틀 뒤 자신의 가게로 돌아와 가게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가게 주인은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이 알던 야쿠자에게 테루히코를 손봐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인해 그는 야쿠자에게 쫓기게 되었고 불안해진 나머지 2월 11일 도쿄도 나카노구에서 홧김에 길을 걷는 여성을 덮쳐 안면을 함몰시키고 차에 태워 자신의 집까지 끌고 가서 강간하는 짓을 저질렀다.

1992년 2월 12일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여고생[6]이 범인의 눈에 띄게 되었다. 테루히코는 쇼핑을 마치고 자전거로 집에 돌아가던 여고생을 차로 들이받은 뒤 '치료를 해 준다'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치료를 받고 나온 여고생에게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타는 것을 권유했다. 별 의심 없이 차를 탄 여고생이었지만 테루히코는 흉기로 위협하여 자신의 집으로 여고생을 끌고 간 뒤 그 곳에서 그녀를 두 번 강간했다. 가학성 변태성욕자였던 테루히코는 나이프로 소녀의 팔과 얼굴을 베면서 몇 번이고 사정했다고 하며, 중간에 잠이 오자 학생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품에 끌어안은 후 잠이 들었고 그녀의 학생수첩에서 그녀의 이름과 집 주소를 베껴 적은 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협박한 다음 돌려보냈다. 그 여고생은 발렌타인 데이를 위해 남자친구에게 줄 초콜릿을 사러가기 위해 친구를 만났다가 뺨의 상처를 본 친구의 질문에 거짓말로 둘러대었다고 한다.

같은 날 밤 테루히코는 호스티스 가게 주인의 요청을 받은 야쿠자의 두목에게 끌려갔다. 야쿠자 두목은 그에게 호스티스를 이틀 동안 감금한 것에 대해 피해 보상금으로 200만엔을 가져오라고 협박했다. 테루히코는 야쿠자들이 두려워서 결국 여기에 동의하고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는데 200만엔을 도무지 구할 길이 없게 되자 전에 자신이 교통사고를 낸 뒤 강간했던 그 여고생을 떠올렸다. 그녀의 집에 을 훔치러 들어가기로 결심한 그는 1992년 3월 5일 오후 4시 30분경[7] 그녀의 집에 침입했다.[8] 그 시간에는 여고생의 할머니가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테루히코는 할머니에게 예금 통장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할머니가 이를 거부하자 전기 코드로 할머니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8만엔을 빼앗았다.

이후에도 테루히코는 집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오후 7시경 여고생과 어머니가 집 안에 들어서자 식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면서 등을 보이고 엎드리게 했다. 여학생은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다리가 풀려 실금하였고 두 사람이 엎드리자 범인은 여고생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의 등과 옆구리를 수차례 찔러 살해한 다음, 그녀에게 소변과 피가 흐른 바닥을 닦게 했다. 공포에 질린 여학생은 테루히코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뒤 여고생의 4살 된 여동생[9]이 집에 돌아왔는데 여고생은 테루히코의 지시로 TV를 틀어 놓고 보고 있었다. 보모를 돌려보낸 뒤 테루히코는 여고생에게 저녁식사를 만들게 하여 셋이서 함께 밥을 먹었다.[10] 저녁을 먹은 후 잠이 오기 시작한 여동생은 '할머니와 같이 자겠다'면서 할머니 방에 들어갔는데 할머니의 죽음을 모른 채 할머니의 시체 옆에서 잠이 들었다.[11]

그러는 사이 테루히코는 여고생에게 예금 통장의 소재를 물었는데 " 아버지 밖에 모른다"는 말에 여고생의 아버지가 귀가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사이에 그녀를 다시 한 번 강간했다.

오후 9시경 여고생의 아버지가 귀가했고 여고생을 강간하던 테루히코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기미에 식칼을 들고 숨어 있다가 아버지를 덮쳐 칼로 어깨를 찔러 부상을 입힌 후 200만 엔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딸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는 예금 통장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줬지만 욕심이 생긴 테루히코는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아버지는 '근무하는 회사의 사무실에 다른 통장과 인감도장이 있다'고 말했고 테루히코는 여고생을 시켜서 사무실에서 그 통장 인감도장을 가져오게 시켰다.

여고생은 아버지의 사무실로 가서 통장과 인감도장을 가져왔다. 아버지 회사의 동료들이 왠지 이상한 모습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버지와 동생이 인질로 잡힌 것이 두려웠던 여고생은 ' 야쿠자가 아버지한테 돈을 받으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돌아왔으나 이미 테루히코는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한 뒤였고 이후에도 테루히코는 그 집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6시경 걱정이 된 아버지 회사의 직원이 여고생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몰래 전화를 받으려고 하던 여고생은 그만 테루히코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그가 큰 소리를 내며 소녀를 위협하자 테루히코의 큰 소리에 놀라 겁을 먹은 여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테루히코는 시끄럽다는 이유만으로 여동생까지도 칼로 찔러 관통시킨 뒤 목졸라 살해해 버렸다. 이전까지는 공포에 떨며 테루히코에게 꼼짝 못 하던 여고생이 여동생의 죽음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 그에게 저항하자 그는 여고생의 왼팔과 등에 칼로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다. 다행히 여고생은 경찰에 의해 구출된 후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12] 하지만 가족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고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남게 되었다.

4. 검거

전화가 갑자기 끊기고, 출근도 하지 않은것을 수상히 여긴 고지의 회사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오전 9시, 잠복해 있던 경찰관들이 테루히코가 우미를 살해하는 현장을 보고 난입하여 그를 체포하면서 14시간여에 걸친 테루히코의 연속 살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 그는 경찰이 들이닥치려고 하자 여고생에게 자신이 흉기로 쓴 칼을 쥐게 하고 피해자인 척 연기를 하는 얄팍한 수작을 부렸는데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심지어 테루히코는 "여자친구의 집에 놀러 왔는데 여자친구가 가족들을 죽여서 말리던 중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경찰은 이 말을 믿지 않고 테루히코를 그 자리에서 체포하고 여고생을 구출했다.

5. 재판

테루히코는 재판에서 아무런 죄책감이나 죄의식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1988년에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들도 징역형을 받았는데, 나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해 여론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특히 살인자 본인이 그런 말을 내뱉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위산과다증이었는데 사람을 두들겨 패고 강간하고 다니면서 내 힘에 자신감이 붙어서 호전되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망언까지 했다.

일본에서 20세 미만의 미성년자에게는 소년법이 적용된다. 소년법의 규정상 18세 미만 소년에 대한 사형 선고는 금지되지만 18, 19세 소년에 대한 사형 선고는 허용되는데 세키 테루히코는 사건 당시 19세였으므로 법적으로 사형 선고가 가능했다. 반면 테루히코가 비교 대상으로 거론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가해자들은 소년 A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18세 미만이라 애초에 사형 선고가 불가능했고 1명을 살해한 것이기 때문에[13] 유일하게 18세 이상이었던 소년 A도 사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테루히코는 법적으로도 사형 선고가 가능했던데다 유아 살해를 포함해 4명이나 강도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4명 이상을 강도살해하고 사형선고를 면하는 경우는 중증 정신질환, 준 심신상실 수준의 심신 미약 등 감형 사유가 거의 의무적인 수준일 경우에나 가능했으므로 사형을 면할 가능성은 없었다.

테루히코는 도쿄 구치소에 수감된 후 재심 청구를 했으나 기각되었으며 마지막 재심청구마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마지막 재심이 기각된 지 얼마 후인 2017년 12월 19일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어 44세의 나이로 죽었다. 여담이지만 테루히코는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교수형을 피하기 위해 살을 찌워 체중이 120kg를 초과했었다고 한다. #[14]

6. 여담

피해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된 여고생은 이후 친척집에서 돌봄을 받다가 독립했고 2004년 , 28세 때 유럽으로 이민을 가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가족이 눈앞에서 몰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고. 다행히도 끔찍했던 상처를 잘 극복한 듯하다.

피해자의 아버지와 여동생은 피해자와 혈연관계가 아니라 재혼으로 가족이 된 사이이며 아버지는 로스의혹사건에서 미우라 카즈요시[15]의 얼굴을 그대로 노출시킨 사진을 실어 논란이 된 언론기사에서 미우라 카즈요시의 얼굴을 촬영한 카메라맨이었다고 한다.

테루히코의 외할아버지는 도매업을 하던 것을 계기로 이치카와 시내에서 장어덮밥 체인점을 전개하면서 크게 성공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내에서는 꽤 알아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인지도가 반대로 독이 되어서 사건 이후 불매운동으로 타격을 받고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으나 이후에도 근근히 버티다가 사건 발생으로부터 21년 후인 2013년 말에 최종적으로 파산해 버렸다고 한다. #

7. 유사 사건



[1] 참고로 세키 테루히코 이름 아래에 있는 마츠이 키요시(松井喜代司, 사형 당시 69세)는 1994년 군마현 안나카시에서 내연녀 및 내연녀의 부모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세키 테루히코와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2] 1973년 1월 29일~ 2017년 12월 19일 [3] 가족 구성원은 여고생, 그녀의 여동생, 부모, 할머니이며 재혼 가정인데 여고생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고 여고생도 눈앞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14시간에 걸쳐 수차례의 강간을 당했다. [4] 테루히코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크 타이슨의 러시처럼 온몸을 인정사정없이 구타하여 몸이 세계지도처럼 되어 버려 수영장도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하며 어머니는 매일같이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 욕조에 머리를 처박혀야 했다고 한다. [5] 이때 4명을 상대로 치고받는 동안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기절시킨 것을 계기로 싸움에 완전히 자신감이 붙어 엄청난 폭군으로 변모하여 닥치는 대로 강간, 폭행치상, 금품 갈취 등을 일으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6] 1976년 3월 19일생이며 연극부와 미술부의 부회장을 할 만큼 적극적이고 교우관계가 활발한 아이였다고 한다. [7] 5시라는 이야기도 있다. [8] 그는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지나가는 여성을 끌고 가서 난폭하게 강간하여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최소 17건 일으켰다고 하며 운전자를 차에서 질질 끌어내리거나 남의 차에 침입해 쇠막대기 또는 나이프로 수십 회 찌르고 금품과 차 키, 면허증을 빼앗는 짓을 여러 차례 일으켰지만 어떤 처벌조차 받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같은 날 오전에도 또 다른 여성을 강간한 상태였다. [9] 1987년 3월 17일생 [10] 밥을 먹으면서 테루히코는 여동생에게 여고생이 자신의 친구라고 소개했고 여동생은 아무 의심 없이 믿었다고 한다. [11] 할머니는 흉기에 찔리지 않고 목이 졸려서 사망했기 때문에 혈흔이 없어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12] 전치 2주면 단순히 긁힌 수준이다. [13] 피해자에게 행한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하고 잔혹한 행동은 몇십 명을 살해한 사람 못지않게 죄질이 나쁘지만 나가야마 기준상 피살자가 1명인 경우는 재판부가 거의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 [14] 실제로 미국에서는 사형수가 과도한 비만 덕분에 교수형을 면한 케이스가 있다. # [15] 축구선수 미우라 카즈요시와 동명이인이다. 한자는 각각 三浦和義, 三浦知良으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