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8981.2.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8991.3.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9001.4.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9011.5.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9021.6.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 1903
5.1. 세리에 A 1929-305.2. 세리에 A 1930-315.3. 세리에 A 1931-325.4. 세리에 A 1932-335.5. 세리에 A 1933-345.6. 세리에 A 1934-355.7. 세리에 A 1935-365.8. 세리에 A 1936-375.9. 세리에 A 1937-385.10. 세리에 A 1938-395.11. 세리에 A 1939-405.12. 세리에 A 1940-415.13. 세리에 A 1941-425.14. 세리에 A 1942-43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들이 국내 컵 대회 뿐만 아니라 자국 리그를 창설하기 시작하자 1898년 당시 이탈리아의 FA격 단체였던 페데라치오네 이탈리아나 델 풋볼[1]은 토너먼트 형식의 축구 리그를 탄생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세리에 A의 전신이자 이탈리아 최초의 국내 리그인 캄피오나토 이탈리아노 디 풋볼이었다.
FC 토리네세,
제노아 CFC, 소치에타 진나스티카 토리노, 인테르나치오날레 토리노의 총 네 팀이 참여하였으며,
오전에 준결승 두 경기, 오후에 결승 한 경기를 치러 하루에 모든 경기를 마무리 했다.[2]
이 대회는 정말 논란이 많은 대회였다. 우선 첫번째 논란은
AC 밀란과 US 밀라네세의 롬바르디아 예선에서 일어났는데,
AC 밀란이 선수단에 등록되지 않은 네덜란드 선수를 사용하여 논란이 불거졌다. 설상가상으로 86분 정전 사태가 일어나 게임은 그대로 중단되었고, 이러한 결과에 US 밀라네세가 FIF(페데라치오네 이탈리아나 델 풋볼)에 항의한 것이었다. FIF는 밀라네세의 항의를 받아들이고 재경기를 하려고 했으나 옳은 판정에 만족한 밀라네세는 재경기를 하지 않고 그대로
AC 밀란이 결선 리그에 가게 되었다.
두번째 논란은 우승과 직결된 논란이었다. 3월 18일
유벤투스 FC와
제노아 CFC의 결선 리그 3번째 경기에서 제노아의 선수 괴츠로프가 유벤투스 선수 디먼트에게 심한 태클을 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구단 선수와 관객 간의 싸움으로 번져 결국 경기가 중단되었다. 유벤투스가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FIF는 재경기를 유벤투스의 홈인 토리노에서 치르기로 한다. 하지만 제노아는 유벤투스 관객들의 보복 가능성을 이유로 거절한다. 따라서 재경기는 밀라노에서 열리게 되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유벤투스의 2-0 승리였다.
제노아는 결선 리그에서 3경기 0승 2무 1패를 기록 중이었므로 우승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결선 리그 4차전인
AC 밀란과의 경기에 불참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AC 밀란은 몰수승을 챙기게 되었고, 1위인 유벤투스와 같은 승점인 5점에 도달하게 된다. 두 팀은 득실차까지 같아서 원래는 중립 경기장에서 우승 결정전을 치러야 하지만, 밀란의 몰수승 2득점은 실재 득점이 아니었으므로 실재 득점이 더 많았던 유벤투스의 홈에서 우승 결정전을 치르게 된다. 결과는 0-0이었고 또다시 재경기를 치러야하는 상황이 오자 FIF는 재경기를 제노아에서 치르기로 결정하는데, 위의 사건을 이유로 유벤투스는 거절한다. FIF는 그래서 US 밀라네세의 홈인 아포리에서 경기를 치르기로 결정하지만 유벤투스는 아포리 또한 밀라노의 위성도시라는 점을 근거로 경기에 불참, 결국 우여곡절 끝에
AC 밀란이 스쿠데토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4팀 만이 참여 했으므로 경쟁 팀이 없었던
리구리아의 소치에타 진나스티카 안드레아 도리아와
롬바르디아의 US 밀라네세는 결선 리그로 직행한다.
이 시즌은 가장 실패한 이탈리아 리그 시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08년 FIF가 '이탈리아 리그에는 이탈리아 선수가'라는 명목으로 외국인 선수를 철저하게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게 되는데 이에 반발이 심하자 FIF는 외국인이 뛸 수 있는 별도의 대회인 '캄피오나토 페데랄레 디 프리마 카테고리아'를 만들게 되고[17], 이탈리아 내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빅클럽들인
제노아 CFC,
AC 밀란,
토리노 FC는 이를 차별이라 여기고 불참을 선언한다.[18][19]
이는 이탈리아 축구에 큰 위기로 다가왔으며[20] 자신의 클럽에 트로피를 안겨다 주었던 외국인 스타 선수들은 이탈리아를 떠나게 된다. 게다가
AC 밀란 내에서 극반대파들은 팀을 탈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라는 클럽은 만드는데까지 이른다.
FIF는 1908년 외국인 규제를 만든 이후 정식 리그로 인정되며 이탈리아 선수로만 구성된 기존의 프리마 카테고리아와, 정식 리그로 인정되지 않고 외국인 선수를 허용하는 캄피오나토 페데랄레 디 프리마 카테고리아를 같이 운영하게 된다. 외국인 선수가 뛰는 리그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차별이라 여긴
제노아 CFC,
AC 밀란등은 저번 시즌 리그는 아에 불참했지만, 이 시즌에는 오히려 FIF를 엿먹이기 위해 일부러 캄피오나토 페데랄레 디 프리마 카테고리아에 참여한다.
FIF의 행보에 불만을 품은 9개의 팀[24] 이 행보에 동참하게 되고, 그들의 의도대로 본 리그인 프리마 카테고리아는 완전히 망해버리고 캄피오나토 페데랄레 디 프리마 카테고리아는 성행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클럽들에게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FIF는 결국 항복을 선언. 1909-10 시즌부터 외국인을 허용하며 두 리그를 통합하기로 한다.
이 시즌 우승 팀 자격은 프리마 카테고리아의 우승 팀이 아닌, 캄피오나토 페데랄레 디 프리마 카테고리아의 우승 팀인
FC 프로 베르첼리 1892가 갖게 된다.
1910년, 베네토 지방의 세 팀[29]와 볼로냐 지방의
볼로냐 FC 1909가 프리마 카테고리아에 참가하기로 하는데, 문제가 생겨버린다.
새로히 참가하는 네 팀과 기존의 참가 팀들 간의 원정 거리가 상당했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보급과 재정적인 문제가 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즌이 시작하기 전 기존 팀과 신규 팀 간의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긴 원정거리로 인한 체력 이슈와 수준차이로 신규 팀들이 전경기를 처참하게 패배하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FIGC는 이것이 신규 참가 팀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행동이라고 판단, 신규 팀들 간의 리그와 기존 팀들 간의 리그를 나눠 우승팀들끼리의 결승전을 진행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로 한다.
이로써 기존 팀들이 참가하는 리그는 캄피오나토 노르도치텐탈레[30], 베네토 지방과 볼로냐 지방의 네 팀이 참가하는 리그는 캄피오나토 에밀리아노-베네토[31]로서 탄생하게 된다.
결승전은 각 리그의 1위 팀이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다.
한편 지난 시즌 꼴등을 기록했던 아우소니아는 리그를 나갔고, 피에몬테 FC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전 시즌 우승팀인 프로 베르첼리와 전 시즌 에밀리아노 베네토에서 전패로 최하위를 기록했으나 1911-12시즌 에밀리아노 베네토에서 우승을 차지한 베네치아 FC가 결승에서 맞붙었으나 너무나도 손쉽게 프로 베르첼리 1892이 합산 스코어 13:0로 베네치아를 박살내며 프리마 카테고리아 4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1]
동년 3월 26일
토리노에서 창설된 이탈리아 최초의 프로 축구 단체였다.
[2]
추가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무승부로 경기가 끝날시 각각 10분의 연장 전후반이 주어졌다.
[3]
하지만 이 시즌 리구리아 주의 또 다른 참가팀인 삼피에르다레나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제노아 CFC가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4]
또한
제노아 CFC는 디펜딩 챔피언이므로, 결승에 바로 진출하였다.
[5]
연장 후
[6]
당시 유럽에서는 승리시 승점 2점을 부여했다.
[7]
4팀으로 늘어남에 따라 홈&어웨이 대신에 한번씩 만나는 걸로 변경되었다.
[8]
하지만
유벤투스 FC와 FC 토리네세의 승점이 같았으므로 진출 결정전이라는 매치를 한번 더 치렀다.
[9]
4강 진출 결정전
[10]
4강 진출 결정전
[11]
프리마 카테고리아에 참여하는 팀의 2군 팀과 프리마 카테고리아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지역의 팀이 참여한다.
[12]
제노아가 3연패를 두번이나 했으므로 페데라치오네 이탈리아나 델 풋볼에서는 특별 트로피인 코파 파우쿠스를 수여한다.
[13]
연장 후
[14]
연장 이후에도 승부가 결정나지 않자 두 팀은 재경기를 치르기로 한다.
[15]
홈&어웨이 방식으로 두번 경기를 치른다.
[16]
프리마 카테고리아로 이름을 바꾸고 예선전에 한번도 참여하지 않은
유벤투스 FC가 처음으로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17]
정식 리그로 쳐주지 않았다.
[18]
찬반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유벤투스 FC는 그래도 끝내 참여하게 된다.
[19]
하지만 웃기게도 유벤투스는 피에몬테 예선전에서
FC 프로 베르첼리 1892에 패배하자 완전히 반대파로 돌아서게 된다.
[20]
제노아 CFC도 외국인의 비율이 높았고,
AC 밀란은 아에
잉글랜드인이 창단한 클럽이었다.
[21]
대회명이 다른 이유는 후술.
[22]
베네치아 FC는 베네토의 유일한 팀이므로 4강으로 직행했다.
[23]
단, 롬바르디아 예선은 리그로 진행
[24]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 선수단으로만 구성된 저번 시즌 우승팀
FC 프로 베르첼리 1892도 동참한다.
[25]
당시 합산 스코어는 없었기에 두 팀 다 승리했으므로 재경기를 치렀다.
[26]
인테르와 베르첼리의 승점이 같았으므로 결승전을 진행하였다.
[27]
승점이 같으면 순위도 같았다.
[28]
베르첼리의 회장이 항의의 의미로 11~15세(...) 선수들을 경기에 내보냈다고 한다.
[29]
LR 비첸차,
베네치아 FC,
엘라스 베로나 FC.
[30]
한국어로 하면 북서부 대회다.
[31]
한국어로 하면 에밀리아와 베네토 대회이다.
[32]
당시 두 리그 사이의 수준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결승전을 치르기도 전에 신문에서는 프로 베르첼리가 우승했다고 미리 공표했을 정도다.
[33]
이 시즌부터 승점이 같을 시 득실차로 순위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