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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1:58

서흥후


1. 개요2. 생애

1. 개요

王琠
(? ~ 1307)

고려의 왕족으로 이름은 왕전, 작위는 서흥후(瑞興侯)이다. 충선왕의 반대파에게 계국대장공주의 개가 상대로 점찍어졌으나 충선왕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처형되었다.

2. 생애

양양공의 아들인 시안공 왕인의 손자이고, 서원후 왕영의 아들이지만 최유엄(崔有渰)은 서흥후를 후사로 세우려는 충렬왕에게, 서흥후가 왕위를 이으면 그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서원후와 시양후 두 사람을 종묘에 모셔야 하기 때문에(若瑞興侯立, 追王其祖禰西原·始陽二侯入祔) 충렬왕의 신위는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전 버전에서 서흥후가 시양후의 양자로 출가했기 때문에 두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서술한 바 있으나 이는 서원후의 아버지인 시공을 잘못 서술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렬왕 27년(1301년) 원나라에 보내져 툴루게에 임명된다. 충렬왕 29년(1303년) 왕이 직접 원에 오는데, 충렬왕의 아들이자 선왕인 충선왕의 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에게 재가시킬 것을 논의한다. 충렬왕은 충선왕을 승려로 만들어버리고 서흥후를 대신 아들로 삼으며, 계국공주는 서흥후에게 재가하게 함으로 충선왕의 복위를 막을 계획을 꾸몄다. 서흥후는 충렬왕의 뜻에 따라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貌美)에 더해 고운 옷을 입고 다니며 계국공주의 눈에 띄도록 한다. 고려사에서는 "계국대장공주가 평소 행실이 문란했기에 금세 서흥후를 마음에 품게 됐다"고 전한다.

고려에서는 왕유소, 송방영 등이 충렬왕을 따라 서흥후를 지지했고, 원에서 황후와 좌승상 아쿠타이 등을 설득해 이 계획에 참여하게끔 했다. 그러나 우승상 타르칸이 이렇게 말하며 반대한다.
이지르부카 왕( 충선왕)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외손이고, 부다공주( 계국대장공주) 또한 종실( 보르지긴)의 딸이다. 적자를 폐하고 개가시키는 것이 이치에 맞는가?" (益知禮普化王, 世祖之甥, 寶塔公主亦宗室女也. 廢嫡改嫁, 於理安乎?)

타르칸은 이어서 서흥후가 왕의 자식은 맞는지 물으며 왕유소를 몰아간다. 홍자번은 이를 놓치지 않고 "왕유소 등이 국왕 부자를 이간질한다"고 원 중서성에 말하니, 서흥후를 옹립하려던 왕유소 등 4인이 옥에 갇힌다.

충렬왕은 경수사에 유폐되고 충선왕이 권력을 잡게 된 이듬해 충렬왕 33년(1307년), 왕유소 등은 문명문[1] 밖에서 참수되고 가산은 적몰됐으며 부자, 형제는 모두 노비가 됐다. 충선왕은 서흥후를 용서하려 했지만, 승상이 불가하다고 해서 함께 참수된다.

[1] 文明門, 대도의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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