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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6:33:14

세르비스 악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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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 le silence et le silence te gardera[1]
(침묵을 지키면 침묵이 당신을 지킬 것이다.)
- 세르비스 악시옹의 부대구호
세르비스 악시옹
Service Action
(행동대, SA)
파일:Insigne service action3.png
창설 1946년 ~ 현재
소속 대외안보총국( DGSE)
분류 기밀작전부대(Service secret)
국가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본부 파리 로맹빌
규모 약 900명
별칭 Action Division, Action Service
1. 개요2. 특징3. 임무 및 편제
3.1. 제44보병연대(44e RI)
4. 역사
4.1. 제11충격공수연대(11e choc)4.2. 붉은 손(La Main rouge)
5. 주요활동
5.1. 중앙 아프리카 쿠데타(1979)5.2. 레인보우 워리어호 폭침사건(1985)5.3. 빅토르 작전(우베아 인질사태, 1988)5.4. 드니 알렉스(Denis Allex) 구출작전(2013)
5.4.1. 보복작전
6. 통폐합?7. 대중매체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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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스 악시옹은 프랑스 해외정보국인 대외안보총국( DGSE)소속 특수작전부서이다. 세르비스 악시옹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국가기밀로 분류되며 이들의 주임무는 프랑스 정부가 은밀히 실행하길 원하는, 군 특수부대가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특수전 범주 외 비밀공작(흑색작전)과 대테러작전을 계획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군특수부대의 지원없이도 독자적인 준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여 DGSE의 군대로도 불린다.

국가 정보기관에서 이런 부대를 운용하는 것이 생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인원에 차이가 있을 뿐 타국의 정보기관에서도 당연히 운용 중이다. 예를 들면 세르비스 악시옹과 유사한 특작부서인 CIA SAD/SOG가 있고, 러시아 FSB 소속 스페츠나츠 알파와 빔펠, SVR 소속 스페츠나츠 자슬론 등... 이런 특수행동부대가 따로 없더라도 보통 공작국 산하에 암살, 납치 등을 담당하는 특수부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임무는 대다수 국가에서는 군 특수부대에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으나 DGSE는 이러한 해외에서의 블랙 작전의 수요가 매우 크기 때문에 그때마다 군 특수부대를 배속받아 운용하는 것보다는 자체적인 특수전과 흑색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특수부서를 따로 운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애초에 DGSE 자체가 민/군 합동 정보기관이기에 그런 것도 있다. 즉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인원들은 대다수가 현역 군인이다. 정보기관 기밀작전부서들은 업무 특성상 현역군인 or 전직군인들을 주로 채용하거나 이들에게 외주를 맡겨 구성하는데, 관군 합동인 DGSE는 기관 태생부터가 특수요원들을 자체적으로 기용하기 매우 좋은 구조인 것이다.

본부는 프랑스 로맹빌에 위치하고 있다. 현대 프랑스 특수 작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부대인데 알제리 전쟁 종전 이후 1960-70년대에 특수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제1해병공수연대 제13용기병공수연대와 같은 부대들이 정식으로 특수작전부대로 지정되기 이전까지 1946-1960년대에 걸쳐서 해외주둔 외인 공수부대와 함께 프랑스의 특수작전을 모두 전담해서 수행했던 현대 프랑스 특수부대의 아버지 역할을 한 유서 깊은 특수부대이기도 하다.

2. 특징

파일:CPEOM20212.jpg 파일:CPEOM2021.jpg
CPEOM(해양작전공수훈련센터)[2]
파일:SA AGENT.jpg 파일:wb_HDjS67cPEiL0rsZ0vNHnn_jILRv68Ct0eEyLM-uE.jpg
CPIS(특수공수교육센터)
세르비스 악시옹은 대외안보총국( DGSE)소속 특수작전부서로 대부분의 프랑스 특수부대가 소속되어 있는 프랑스 특수작전사령부(COS)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세르비스 악시옹이 지원을 맡고 해군 코만도가 주축이 되어 수행한 수차례의 소말리아 인질구출작전과 같이 때에 따라선 COS 소속의 군 소속 특수부대와 협력하여 작전하는 모습도 자주 보이고 있다.

세르비스 악시옹은 총인원 900명에서 군인+민간요원이 혼재된 부대구조를 보이는데 이는 DGSE가 정부 정보기관과 군 정보기관이 분리되어있는 타 국가의 대외정보기관 체제와 다르게 두 정보기관이 하나로 통합된 관군합동 정보기관[3]이라는 특수성[4]에서 기인한다.

즉, 소수의 민간출신요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세르비스 악시옹 요원들은 타 군부대에서 이곳으로 배속, 지원해서 전출해온 현역군인들이다. 민간과 군인을 분리하는 문민통제가 시행되는 국가의 정부정보기관에서 현역군인들이 활동하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DGSE는 관군합동 정보기관이라서 현역군인들이 활동해도 문제가 없는 것.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에 특전사에서 전출온 현역군인들이 특수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주로 특수부대에서 전역한 민간인 신분의 퇴역군인들을 요원으로 채용하는 타 국가의 정보기관 직속 특수부서와는 다른 점이다.

알제리 전쟁 당시 펼친 암살 공작과 냉전시대 아프리카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 그리고 그린피스 같은 민간단체 또한 공격 대상에 포함시키는 등 도덕적 관점에서 벗어나 철저히 프랑스라는 국가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레인보우 워리어호 폭침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간인을 공격하여 국민의 안전보다 국익을 더 우선시했다는 비판 또한 받고 있는 부대이기도 하다.
파일:cwr234-00002-CPEOM.jpg
훈련 중인 SA CPEOM 소속 대원들의 모습

보안이 중요시되는 정보국 소속의 특수부대답게 실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작전중에 촬영된 사진도 존재하지 않고 딱 한 장의 전사자 사진과 소수의 훈련 사진으로 그 모습을 추정 가능할 뿐이다. DGSE가 국방부 산하기관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군 소속 특수부대가 아니기에 대부분의 대원이 복장에 제한 없이 사복을 입고 훈련, 작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무장도 일반적인 서방 특수부대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적지에서 사용이 용이하도록 AK 계열 소총을 사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대부분의 신입대원을 군 내부에서 모집하며 1년에 프랑스 각군의 다양한 특수전 부대에서 해외실전 경험이 풍부한 100명의 지원인원을 선발하여 그 중 약 20명의 인원이 세르비스 악시옹에 신입대원으로 합류한다고 한다. 주로 같은 정보계통 특수부대인 제13용기병공수연대의 대원들이 많이 선발된다고 하며 육군의 제1해병공수연대, 해군의 해군 코만도에서도 선발된다. 육군의 정예 공수부대에서도 대원을 선발하며 드니 알렉스 구출작전에서 중상을 입어 미스트랄 함상에서 사망한 CPIS 소속 패트릭 흐부 대위[5]가 제8해병공수연대(8e RPIMa) 출신이었으며, 이외에도 프랑스 외인부대의 정예 공수부대인 제2외인공수연대(2e REP)소속 대원도 CPEOM으로 지원해 선발된 사례도 있다. 2018년에는 프랑스군 내에서 10명의 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발표했다. 다만 인원선발은 일반 군 특수부대보다 더욱 은밀한 작전을 수행하는 정보국 특수부대라는 부대특성상 상당히 불규칙적이어서 특정년도에는 단 한 명의 대원도 선발되지 못하는 해도 있다고 한다.

3. 임무 및 편제

파일:ob_629b0e_2009-03-22-dgse-0.jpg 파일:977db2_34788464984-96802cdf0b-o.jpg
GAM-56소속 DHC-6기에서 강하훈련중인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 측면에 부가 센서를 장착하고 민간도색을 한 GAM-56 소속 H225 헬리콥터
세르비스 악시옹이 주로 수행하는 작전은 국가가 공개적으로 밝히기 꺼리는 임무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적국에 대한 사보타주, 파괴공작과 요인 납치 및 암살 임무가 있다. 그 외의 임무로는 프랑스 국토 내에 위치하는 원자력발전소와 같은 국가안보와 연관되어 있는 민간시설과 핵잠수함 기지와 같은 중요 군사시설물의 보안 평가 임무를 수행하며 DGSE에서의 수집된 정보의 분석과 암호해독 임무도 담당하고 있다.

세르비스 악시옹은 DGSE소속의 민간인 요원+군인요원과 육군의 제44보병연대의 배속인원과 지원단을 합해 총 9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보수집, 암호해독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지원요원들을 제외한 특수작전을 전담하는 실제 작전에 투입되는 인원(operator)의 규모는 지금까지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2013년 공개된 구출작전에서 타 특수부대의 지원 없이 세르비스 악시옹이 단독으로 수행한 작전에서 통신, 폭발물 처리, 저격, 응급치료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가 포함된 50명의 작전 대원이 동원된 것이 알려져, 실질적인 작전 대원의 규모는 그 수배 규모인 수백 명 정도의 수준이라고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6]

작전조직은 크게 CPES, CPIS, CPEOM으로 구성된다.
파일:Insigne CPES.png 파일:Insigne CPIS.png 파일:Insigne CPEOM.png
CPES CPIS CPEOM

프랑스 공군에는 세르비스 악시옹을 지원하기 위한 전용 수송부대인 보클뤼즈 제56혼성항공단(Groupe aérien mixte 56 Vaucluse:GAM-56)이 편재되어있다. 해당 부대는 3기의 H225 특수전 헬리콥터와 2기의 C-160R, C-130H 수송기와 3기의 DHC-6 항공기로 구성된다.

이밖에도 필요에 따라서는 육군과 해군의 장비을 이용하기도 하며 육군 특수전사령부 소속의 특수전 헬리콥터와 수중침투와 퇴거를 위해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을 이용하기도 한다.

3.1. 제44보병연대(44e 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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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e régiment d’infanterie
1642년에 최초로 창설된 프랑스 육군의 부대로 1986년부터 DGSE로 배속되는 프랑스 군인 인력, 기술, 훈련 등을 지원하는 임무를 위해 존재하는 지원부대로 1,000명 가량의 인원이 소속되어있다. 행정연대의 형태로 프랑스군에서 DGSE의 다양한 부서로 배속되는 군인들이 이곳에 서류상으로 소속된다.

즉, DGSE의 세르비스 악시옹 요원들은 편제상으론 전부 제44보병연대 소속이다. 각종 서류나 봉급명세서에도 DGSE가 아닌 제44보병연대 소속으로 명기된다.

4. 역사

파일:dzSDcFppVgPItJHUouiX4AFcbI4.jpg 파일:2352523.jpg
세르비스 악시옹의 본부인 파리 로맹빌의 누와지 요새 CPIS 주둔지인 페르피냥 마요르카 왕궁
1946년 대외 정보 방첩국(SDECE) 산하의 조직으로 처음 창설되었으며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서 활약했다. 특히 알제리 전쟁에서 세르비스 악시옹은 알제리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많은 공작을 실행했는데 1960년에만 135명이 세르비스 악시옹의 위장 테러조직인 붉은 손(La Main rouge)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들의 주요 공격대상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소속의 무기 공급자들이었다. 알제리 전쟁 이후 1963년 세르비스 악시옹의 무장부대인 제11충격공수반여단(11e DBPC)이 해체되면서 이들의 임무는 제1해병공수연대 제13용기병공수연대 같은 군 특수부대들에 의해서 인수되어 수행하게 되며, 1970년대 세르비스 악시옹은 아프리카 정권에 대한 개입과 지원을 주로 수행했다. 아프리카에 위치한 반공 성향의 독재정권을 물밑에서 지원하는 역할 또한 맡았으며 대표적으로 앙골라 내전에서 조나스 사빔비 UNITA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979년 제1해병공수연대와 함께 장 베델 보카사 황제의 중앙아프리카 제국을 전복시키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중동에서 발생한 베이루트 폭탄 테러에 대한 보복작전에 참여하였으며 1985년에는 레인보우 워리어 호 폭침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소련군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기술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92년 프랑스의 통합 특수전사령부인 COS가 창설되었지만 세르비스 악시옹은 여기에 소속되지 않았으며 1994년 캄보디아에서 3명의 영국, 호주, 프랑스인이 크메르 루주에게 납치되자 영국의 SAS와 함께 구출작전을 모색하기도 했다.[9] 2000년대 들어서는 이라크전에 간접적으로 참여하였으며 2009년에는 해군 코만도와 함께 소말리아 해에서 인질구출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2011년 리비아 전쟁에서는 트리폴리 전투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4.1. 제11충격공수연대(11e choc)

파일:Saut-dun-commando-du-11-en-NORD-2501.jpg 파일:Paul Aussaresses.jpg
1950년대, 공수훈련중인 11e choc 11e BPC 창설시기 대대장인 폴 오사레스(Paul Aussaresses)[10]
파일:rpc_11-208a2.jpg
11e régiment parachutiste de choc
창설 1946년 9월 1일
해체 1993년 6월 30일
존속기간 1946년~1993년
부대특성 공수부대
소속 SDECE→DGSE
주요임무 기밀군사작전
Qui Ose Gagne (과감한 자가 승리한다)[11]
(Who Dares Wins)
- 제11충격공수연대의 부대구호
제11충격(11e choc)[12]은 2차세계대전 종전후 프랑스의 현대적 특수작전수행을 위해 창설되어 프랑스 대외정보국인 SDECE 산하의 무장무대로 편재된 공수부대이다. 초창기에서는 대대로 창설되어 부대규모가 개편과정에서 부대가 확대되었으며 1993년 해산당시 최종적인 부대규모는 연대이다.

제11충격공수연대(11e choc, 11e régiment parachutiste de choc)는 1946년 11월, 당시 프랑스 대외정보기관이었던 대외정보방첩국(SDECE) 휘하의 무장부대로 창설되었다. 부대창설 당시에는 SDECE에 배속된 육군소속 제11충격공수대대(11e bataillon parachutiste de choc, 11e BPC)로 창설되었다. 대외정보방첩국 창설초기에는 이러한 무장조직이 없었지만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외정보방첩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해 무장력강화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체적인 심리전과 파괴공작이 가능하도록 특수작전역량을 대폭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정보국 소속 공수부대가 창설된 것이다.

11e choc가 세르비스 악시옹에 편제되면서 세르비스 악시옹은 기존의 일반적인 첩보조직에 공수부대가 결합된 특이한 조합의 부대가 탄생하였으며, 세르비스 악시옹은 정보기관의 부서이면서 강화된 무장력으로 기밀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프랑스는 영국의 SAS,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코만도스와 같이 전쟁시 비정규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특수부대가 필요했으며, 당시 프랑스에는 자유프랑스군 소속으로 유럽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다양한 정규, 비정규전 전투를 경험하여 풍부한 특수전 경험를 가진 군인들이 많았다. 프랑스군이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들이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이 된다면 프랑스는 이러한 특수전 경험를 자연히 잃게 될 것이기 때문에 SDECE는 이들을 재빨리 지휘관으로 영입하여 새롭게 창설된 부대의 틀을 잡고 병력훈련을 맡게 하였다. 부대원은 절반은 공수부대 출신 병사를 선발하고, 나머지 절반은 징집병으로 선발했다. 강인한 체력과 외국어 구사능력을 가진 병사를 선발했으며 이들은 헌병대에 의한 철저한 신원조사가 이루어졌다.

제11충격공수대대는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했으며 인도차이나 반도 전장에서 11e choc 장교들은 현지 원주민들을 포섭, 작전에 기용하면서 현지 전장에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전세는 크게 기울어 있었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면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수했다.
1955년 10월에는 알제리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1개 대대(12e BPC)가 추가되어 제11충격공수반여단(11e demi-brigade de parachutiste de choc, 11e DBPC)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제12충격공수대대(12e BPC)는 창설직후 부대명칭이 제1충격공수대대(1er BPC)로 다시 변경되었다. 1956년에는 수중전투훈련센터(CINC, Centre d'Instruction des Nageurs de Combat)가 개설되어 11e DBPC에 통합되면서 수중전투능력도 갖춘 전천후 특수부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후 수에즈 전쟁에 2개 대대가 모두 참여했으며 알제리 전쟁에서 암살, 납치, 폭파등의 특수임무를 수행해 활약했으며 1957년, 알제리 전쟁이 절정에 이르는 전투인 알제 전투에서도 약 1,000명의 제11충격공수반여단 대원들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1961년 알제리에서 알제리 존속파 테러 단체 ' 비밀군사조직(OAS)'[13]에 의해서 발생한 쿠데타인 ‘알제의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중앙 정부의 의심을 받게 되면서[14] 1963년 12월 30일 부대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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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알제리에서 프랑스 포르 방드르항으로 귀환한 11e DBPC 대원들

제11충격공수반여단이 해체되면서 대외정보방첩국의 특수작전 역량은 1960년대 기간동안 상당히 축소되었으며 이들의 역량은 프랑스가 다시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는 1970년에야 기존수준으로 회복된다. 이들이 기존에 수행하던 임무는 제1해병공수연대 제13용기병공수연대에 분산되었다.

이후, 1982년 대외 정보 방첩국(SDECE)이 대외안보총국( DGSE)로 명칭이 변경되고 조직이 대규모 개편되면서 DGSE 휘하의 연대급 특수작전부대인 제11충격공수연대(11e régiment parachutiste de choc, 11e RPC)로 1985년 재창설되었다. 1988년 누벨칼레도니에서 발생한 인질극의 진압부대로 GIGN 코만도 위베르 등 다른 군특수부대와 함께 인질구출작전인 빅토르 작전(L'opération Victor)에 참여했다. 걸프전 이후 프랑스 특수부대의 대규모 개편 과정에서 1993년 6월 30일 해체되었으며 기존 부대인원은 전역하거나 새롭게 창설된 CPES와 CPIS에 분산배치되었다.

4.2. 붉은 손(La Main rouge)

파일:red hand.jpg
독일 영화 The Red Hand(1960)에서 묘사된 붉은 손 대원.
파일:La-Main-rouge8.jpg
La Main Rouge, The Red Hand
활동시작 1952년
활동중지 1962년
활동기간 1952년~1962년
부대특성 위장테러조직
소속 SDECE(존재부정)
주요임무 북아프리카 식민 국가들의 독립저지
붉은 손(La Main rouge)은 195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해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62년까지 북아프리카, 유럽 지역에서 활동한 SDECE의 비밀결사이자 위장 테러조직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후 북아프리카 지역의 프랑스의 자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의 독립여론이 고조되었고 이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이러한 독립여론을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수행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명예롭게 수행할 수 없는 과격한 흑색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위장조직이 만들어졌다.

당시 SDECE의 행동부대였던 세르비스 악시옹 요원들이 이들 활동의 큰축이 되었으며 이들의 주요표적은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지역의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친 알제리 성향의 사회활동가 및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의 조직원, 그리고 FLN에게 무기를 공급하던 유럽 지역의 무기공급업자들이었으며 알제리 전쟁기간에는 프랑스의 작전을 방해하는 외국인과 프랑스인도 표적대상에 포함되었다. 붉은 손은 이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테러를 실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활동기간은 10년 정도로 짦았으나 민간인까지 테러 대상에 포함시키는 임무의 과격성으로 악명을 떨쳤다.

붉은 손은 프랑스 정부와의 연계성을 부정하기 위해 겉으로는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별개의 테러조직으로 위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SDECE 지휘하에서 활동했다. 초기에는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별개의 조직으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훗날 여러 인물들의 증언으로 붉은 손이 SDECE 내부의 하부행동조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붉은 손의 존재와 활동을 여전히 부정하는 SDECE 출신인물들도 있다.

붉은 손의 주요표적은 주로 FLN 조직원이었지만 친 알제리 성향의 유럽인, 심지어 프랑스 국적인도 테러대상에 포함되었다. 차량폭탄, 총격, 석궁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공격하거나 암살했다. 이러한 작전의 과격성으로 다수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부상, 사망하기도 했다.

이들의 과격한 수단의 무장테러활동은 북아프리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북아프리카 무장독립세력을 위한 무기가 북아프리카로의 유입되는 것을 억제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랑스령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하였으며 도리어 알제리 FLN의 무기공급선을 비롯한 여러 이념들이 친서방에서 친공산권으로 옮겨가는 결과를 낳았다. 알제리는 독립 후 현재까지도 군사, 정치적으로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로 남아있다. 붉은 손 내부의 과격파 일부는 알제리 독립 후 OAS로 옮겨가기도 했다. 1962년 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게 되면서 작전이 중단되었다.

직접 지시자였던 프랑스 정부는 붉은 손에 관한 정보를 현재까지도 공개하고 있지 않으며 붉은 손의 존재와 프랑스 정부와의 연계성, 활동사항 또한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당시 SDECE 인물들의 훗날 증언 및 피해자들의 교차검증을 통해서만 이들의 활동이 드러나며 붉은 손의 활동기간 동안 이들에 의해서 얼마나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도 현재는 불명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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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함부르크 항에서 수중폭파된 상선 아틀라스호 195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게오르크 푸헤르트(Georg Puchert) 차량폭탄공격 사건현장

5. 주요활동

파일:nageurs-de-combat-l-ecole-du-silence-2.jpg 파일:CPIS 17.jpg
세르비스 악시옹은 프랑스의 해외정보국인 DGSE의 무장부대이자 행동부대로서 광활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주요작전지역은 프랑스의 이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는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이며 적성국과 동맹국의 영토도 활동지역에 포함된다. 단, 해외정보국 산하의 부대로서 프랑스 국내에서는 작전을 원칙적으로는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과거 동맹국 및 우방국의 영토내에서 납치, 암살, 특수공작을 실행한 것이 밝혀져 국제문제로 불거진 전력이 있다.

과거부터 프랑스와 친한 아프리카 지역국가들의 정권을 지원하고 견제하는 임무를 수행해왔으며 프랑스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정권은 쿠데타와 암살등의 수단을 사용해 여러차례 전복시켰으며, 1963년 이후 현재까지 최소 22명의 아프리카 대통령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

2010년대 이후에도 매우 발활하게 활동중이며 2016년에 열린 프랑스 국민의회 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2013년~2015년 3년간 51건의 해외 대테러작전이 서비스 악시옹에 의해서 수행된 것이 확인되었다. 작전이 가장 많이 수행된 지역은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이며, 그 다음 아프간-파키스탄 지역, 아프리카의 뿔[15], 시리아, 유럽, 리비아와 이집트순으로 확인되었다. #

2016년 DGSE의 기술국장이었던 베르나르 바비에(Bernard Barbier)가 인터뷰 #에서 2010년 7월 아프리카 모리타니에서 세르비스 악시옹에 의해 수행된 작전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모리타니의 수도 누악쇼트에 소재한 프랑스 대사관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던 지하디스트 단체를 표적으로 삼았으며 세르비스 악시옹의 특공대[16]가 프랑스 첩보위성이 제작한 작전지역의 3D지도를 이용해 야간에 급습해 지하다스트들을 새벽녘에 사살했으며 당시 사살당한 지하디스트가 소지했던 AK소총을 특공대장이 선물하여 자신의 집무실에 걸어두었다고 하며 소총을 선물한 특공대장[17]은 안타깝게도 몇 년 뒤 소말리아 작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5.1. 중앙 아프리카 쿠데타(1979)

1979년 중앙 아프리카 제국을 전복하기 위한 군사작전인 Opération Caban에 선발대로 참여했다. SDECE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GO(Groupement Opérationnel, 공작조) 대원들이 C-160 수송기로 공중으로 침투하며 방기 수도국제공항을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공항을 완전점령 직후, 도착한 제1해병공수연대와 후속으로 도착하는 제3/8해병공수연대에게 수도점령작전을 인계하고 작전개시 4시간만에 철수했다.

5.2. 레인보우 워리어호 폭침사건(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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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ffaire du Rainbow Warrior
Sinking of the Rainbow Warrior, Opération Satanique

DGSE 그린피스를 목표로 수행한 사보타주 파괴공작으로 1985년 7월10일 남태평양에 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섬 모루로아 환초(Moruroa) 핵실험을 저지하기 위해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에 정박한 그린피스 소속 범선 레인보우 워리어(Rainbow Warrior)를 4명의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CINC[18]요원들이 수중폭파하여 격침시켰다.

이로 인해 그린피스 소속 사진작가인 페르난도 페레이라(Fernando Pereira)가 사망했다.[19] 실제로 DGSE요원들은 선박에 2개의 폭탄을 설치했는데 첫번째 폭탄은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외부로 대피하게끔 설치된 폭탄이었으며, 두번째 폭탄이 실제로 레인보우 워리어호를 침몰로 이르게한 치명적인 폭탄이었다. DGSE대원들의 예상대로 다른 그린피스 대원들은 첫번째 폭탄이 터지자, 폭음에 모두 배밖으로 대피했으나 페레이라는 카메라를 가지러 혼자 배로 들어갔다가 DGSE요원들이 모든 사람들이 대피했다고 생각하고 기폭시킨 두번째 폭탄에 휘말려 사망한것이다. DGSE가 인명피해없이 그린피스 선박만 침몰시키위해 짠 계획이었으나 결국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작전 직후 4명의 요원은 해안에서 대기중이던 원자력 잠수함 루비함으로 철수했으며 사건 수사과정에서 뉴질랜드 현지에 남아있던 DGSE 소속 공작 요원 2명[20]이 체포되었다. 뉴질랜드 정부는 해당 사건이 뉴질랜드의 영토주권을 침해한 행위이며 프랑스에 의한 테러로 규정, 양국 간 정치적 국제문제로 치닫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는 뉴질랜드 정부에 사과하고 그린피스와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이 사건으로 에르뉘 프랑스 국방장관과 DGSE 국장이 사임하였으며 작전을 수행한 부대인 CINC가 해체되고 CPEOM이 창설되었다.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 2명은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프랑스 정부와 뉴질랜드 정부 간 물밑교섭 끝에 복역 1년 후 뉴질랜드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군사시설로 이감되었고, 2년 뒤 두 사람 모두 질병 치료 및 임신[21]을 이유로 프랑스 본토로 송환되어 출소했고 이들은 프랑스에서 영웅적 대접을 받았다.[22]

그린피스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극적인 일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그린피스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3. 빅토르 작전(우베아 인질사태, 1988)

L'opération Victor (La prise d'otages d'Ouvéa)

1988년 4월 22일 발생한 인질사건 초기에는 국가헌병대 소속 대테러부대인 GIGN, EPIGN만 투입되었지만 프랑스 중앙정부에서 최종적으로 강경진압이 결정되자 본토에서 증원부대로 코만도 위베르, DGSE의 특수작전부대인 제11충격공수연대가 투입되었다. 34명의 제11충격공수연대 대원이 작전에 참가해 74명의 특수부대가 투입된 빅토르 작전의 주축이었으며 2명의 대원이 진압과정에서 전사했다.

5.4. 드니 알렉스(Denis Allex) 구출작전(2013)

파일:Denis Allex.jpg 파일:SA 2013.jpg
무장단체 알샤바브에 의해 공개된 SA대원의 시신 사진과 해당 사진을 바탕으로 12인치 피규어로 재현한 작전당시 SA CPIS 대원의 모습. H&K MP7로 무장했었다.
La prise en otage de Denis Allex (Combat de Buulo Mareer)

2013년 1월 11일 세르비스 악시옹이 소말리아에 알샤바브에 의해 피랍되어 있던 DGSE 요원 드니 알렉스를 구출하기 위해 수행한 군사작전이다. 드니 알렉스는 2009년 소말리아에서 활동중에 알샤바브에 의해서 피랍되었다. 함께 피랍된 1명의 동료는 얼마후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드니 알렉스는 실패하여 3년간 소말리아에서 피랍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3년 간 드니 알렉스의 소재파악을 진행했으며 드니 알렉스는 2013년 초, 소말리아 모가디슈 남서쪽으로 약100km 떨어진 알샤바브 점령하에 있는 도시인 불로 마레르(Buulo Mareer)에 위치한 알샤바브의 은신처에 피랍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프랑스 정보당국은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구출작전을 수립했다. 소말리아 내륙에 위치한 알샤바브의 본거지에 야간에 육로로 은밀히 잠입, 시설을 습격하여 인질을 구출한다는 작전이었다.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 CPIS 작전요원 40명이 작전의 주축으로 참여했으며 프랑스 특수작전사령부(COS)에서는 별도의 작전대원이 참여하지 않고 육군의 제4특수전헬리콥터연대와 공군 제56혼성항공그룹 소속의 카라칼 특수전 헬리콥터 4기, 타이거 공격헬기 2기 등 총 6기의 헬리콥터가 작전에 참여했다.

CPIS는 야간에 소말리아 해상의 강습상륙함 미스트랄함에서 출발했다. 카라칼 헬리콥터가 작전인 불로 마레르 지역 부근에 도달하자 세르비스 악시옹 그룹은 헬리콥터 소음을 피해 작전지점에서 9km 떨어진 지점에서 투입되었다. 그 이유는 침투의 은밀성을 해치는 헬리콥터 소음에도 있었지만 무인기와 인공위성을 이용한 사전정찰에서 본거지 주변에 소련제 KPV, ZU-23, DShK등 헬리콥터에 치명적인 대구경 중화기들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헬콥터에서 투입된 세르비스 악시옹 작전그룹은 육로로 수시간동안 이동했다. 불로 마레르 시가지에 위치한 알샤바브 본거지에 도착한 세르비스 악시옹 작전그룹은 인질이 수감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건물 수m 앞까지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접근하였다.

그 와중에 건물을 경비하는 1명의 반군에게 위치가 발각되었고[23] 이후 45분간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들과 알샤바브 병력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작전지점에 펼쳐져 있는 알샤바브의 전력은 작전이 실행되기전 정보와는 다르게 최소 150~200명 이상의 많은 병력과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RPG로켓, 중기관총, 대공포에 의해서 세르비스 악시옹은 매우 고전해야 했다.[24] 또한 드니 알렉스의 피랍장소가 불로 마레르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수하는 SA 대원들과 피랍장소로 몰려드는 알샤바브 병력들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으며 반군과 민간인 식별이 어려운 난전속에서 교전에 휘말린 소말리아 민간인 사상자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알샤바브 주장)
파일:Buulo Mareer oppic.jpg
작전당시 SA와 알샤바브와의 교전이 발생한 불로 마레르(Buulo Mareer) 남부지역의 위성사진
세르비스 악시옹은 전투중 17명 이상의 알샤바브 조직원을 사살했지만 최종적으로 인질구출은 실패하였으며 1명의 대원이 전투중 중상을 입어 헬리콥터로 후송되어 강습상륙함의 의료시설에서 치료중 사망했으며, 또다른 1명의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이 긴박한 퇴각과정에서 실종되었다. 세르비스 악시옹이 사살한 반군외에도 그들의 퇴각로를 확보하고 화력지원을 위해 투입된 2기의 타이거 공격 헬리콥터가 사살한 알샤바브 반군만 해도 50~70명에 가까울 정도로 대규모 전투였다.

작전 종료 후, 중상을 입은 1명의 대원은 철수과정에서 헬리콥터로 회수되었지만 강습상륙함의 의료시설에서 치료중 사망했으며, 실종됐었던 1명의 대원[25]은 사망하여 알샤바브에 의해 시신과 작전 당시 휴대했던 장비들의 사진이 전 세계에 공개되기도 했다. 인질이었던 드니 알렉스는 전투 과정에서 알샤바브 대원들에게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26]. 알샤바브는 작전직후에도 드니 알렉스는 살아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작전 5일후인 1월 16일에는 드니 알렉스를 구출 작전의 대가로 16일 당일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방부는 작전이 수행된 11일 이후에 드니 알렉스가 생존했다는 어떠한 증거[27]도 발견하지 못했으며 "모든 것이 드니 알렉스가 간수들에게 총을 맞았음을 시사한다"며 알샤바브에서 드니 알렉스가 작전 이후에도 살아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정보조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알샤바브는 작전 직후에는 드니 알렉스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했는데 작전후 5일간의 기간동안 드니 알렉스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어떠한 증거도 알샤바브가 지금까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 알샤바브는 처형 사실을 사진이나 영상자료가 아닌 이메일로 통보했는데 처형했다는 증거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작전에서 100명에 가까운 알샤바브 반군이 사살되었지만 인질이었던 드니 알렉스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된 2명의 대원이 추가로 전사하여 DGSE와 세르비스 악시옹에게는 뼈아픈 실패일 수밖에 없는 작전이다.[28]

이후 불로 마레르는 다음해인 2014년, 장갑차량과 로켓포, 박격포등 중화기로 무장한 3개 대대규모의 아프리카 평화 유지군(AMISOM)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다. #

5.4.1. 보복작전

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에도 DGSE는 2009년 당시 2명의 DGSE 대원의 납치를 주도한 당시 알샤바브의 지도자였던 아흐메드 압디 고다네(Axmed Abdi Godane)의 거소를 계속 추적하였다. 하지만 아흐메드 고다네는 인구밀집지역의 잘 방어된 은신처에 은신해 있어 특수부대를 투입한 생포 및 사살작전이 매우 어려웠다.

2014년 9월 1일, 아흐메드 고다네는 자신에 대한 추적과 감시가 느슨해졌다고 판단하고 소말리아 남부의 새로운 거소로 2명의 경호원과 함께 눈에 띄지 않도록 1대의 차량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은 DGSE에게 포착되었고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와 올랑드가 사살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차량과 가장 가까웠던 지부티의 미군부대에 아흐메드 고다네가 탑승한 차량의 위치를 알려주어 수시간만에 긴급하게 작전이 실행되었다.

작전 승인 즉시 2기의 무인공격기가 이륙하여 DGSE가 전송한 차량이 이동하는 장소로 이동하였으며 아흐메드 고다네가 탑승한 차량에 1발 이상의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차에 타고있던 아흐메드 고다네를 포함한 3명은 그자리에서 모두 즉사했다.

차량은 철저히 파괴되어 작전당시에는 물증을 통한 사망확인이 어려웠지만 이후 알샤바브에서 아흐메드 고다네의 죽음과 복수를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아흐메드 고다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6. 통폐합?

특수전사령부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음지에서 비밀공작을 수행하는 정보국 소속의 블랙 옵스 부대로서 과거에서부터 정치권의 견제와 프랑스의 기존의 군 특수부대와의 통합 요구를 수차례 받아왔다. 이러한 주장은 프랑스 특수전 사령부가 창설된 직후인 1993년에 처음 제기되었으며 2013년 CPIS가 소말리아에서 50명의 대원과 다수의 헬리콥터를 동원해 수행한 드니 알렉스 구출작전이 실패하면서 이러한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2014년 프랑스 상원 보고서에서는 DGSE의 자체적인 대규모 준군사작전의 중단을 요구했으며 정보국 본연의 은밀한 소규모 임무만을 수행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세르비스 악시옹의 수중 전투부대인 CPEOM은 해군 소속 코만도 위베르에, 육상전투부대인 CPIS는 육군 특수전 여단에 통합하며, 세르비스 악시옹 전용 공중수송부대인 프랑스 공군 소속 보클뤼즈 제56혼성항공단은 공군 소속의 푸아투 제3/61특수전수송대대에 통합하는 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정보국 특수부대는 군 특수부대와 비교해 부대의 외관과 목적이 비슷해 보이지만 수행하는 임무의 성격이 엄연히 다르며, 이러한 제안은 동맹국 영토를 포함하여 적성국과 위기 지역에서 프랑스 국기를 표시하지 않고 강제로 은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우려가 있으며 이러한 성격의 부대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이러한 요구는 번번이 기각되었다고 한다.[29]

7. 대중매체

1971년에 발표된 소설과 이를 영화화한 자칼의 날에서 프랑스 정보기관 SDECE 소속으로 등장한다. 1962년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의 독립을 허용하자 프랑스령 알제리에 주둔했던 군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무장조직 OAS[30]를 조직하고 무력투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이 시도한 드골 암살 계획이 모조리 실패하고, 프랑스 정부가 탄압의 고삐를 단단히 죄자, OAS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 와중, SDECE는 국내 OAS의 수상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세르비스 악시옹[31]이 수집한 정보의 조각들을 추합해 최종적으로 OAS가 자칼이라는 암살자를 고용해 대통령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암살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작중에서 세르비스 악시옹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해외에서의 목표에 대한 도청, 납치와 고문을 서슴지 않는다. SDECE 국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탈리아에서 OAS 작전 총책 마르크 로댕의 경호원이였던 빅토르 코왈스키를 납치해 본토로 송환 후, 전기고문 끝에 최종적으로 암살 계획에 관한 정보를 알아낸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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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고질라에 등장한다. DGSE는 극 초반부터 프랑스의 핵실험으로 인해 탄생한 고질라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나마 이미 파악하고 흔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파견된 세르비스 악시옹 그룹은 오해로 태스크포스에서 쫒겨난 작중 주인공 닉 타토포리스( 매튜 브로더릭 분)와 합심하여 미군으로 위장해 계엄령이 선포된 뉴욕에 잠입한다. 수색 중 고질라의 둥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인력과 장비가 부족했고 알의 부화가 시작된 후 알에서 태어난 수백 마리의 고질라 새끼들에게 차례로 사냥당한다. 주인공 일행의 활약으로 최종적으로 고질라를 없애는 데에 성공하지만 살아 돌아간 건 팀장인 필립 로체( 장 르노 분)뿐이다.

작중 마지막까지 미국 정부는 DGSE와 세르비스 악시옹의 자국 내 개입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한다. 필립 로체는 자신들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수거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8. 관련 문서



[1] 짧게는 Le silence vous gardera. 코르시카의 속담으로 SA요원들이 사용하는 비공식 모토이다. [2] 프랑스 육군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TIM 2021년 3월호 #에 게시된 사진으로 세르비스 악시옹의 공식 사진 중에선 가장 최신의 사진이다. [3] 현재 DGSE는 총 7000명의 인원중 약 1,000명이 현역 군인신분이며 이들의 대부분이 세르비스 악시옹 요원들이다. 과거 SDECE시절에는 총인원의 거의 절반이 군인들이었으나 DGSE로 개편이후 민간인 비중을 늘려 지금은 군인의 비중이 많이 줄은 것. [4] 물론 프랑스는 DGSE외에도 군사정찰국(DRM, Direction du Renseignement militaire)이라는 군정보기관도 운용중이다. [5] 1976년생으로 1996년에 육군에 입대해 8e RPIMa에 배치되어 보병으로 복무하다가 이후 장교과정에 지원해 8e RPIMa 장교가 되어 총 10년 이상을 낙하산 연대에서 복무후 2008년 CPIS로 자원해 이적한 베테랑 대원이었다. [6] 어떤 특수부대도 하나의 작전에 부대 전 병력을 총동원해서 동원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예비병력과 타지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인원까지 합친다면 실제 규모는 최소 그 수배의 규모라는 의미. [7] 인질이었던 DGSE 요원 드니 알렉스 또한 CPIS 소속 특수요원이었으며 1980년대 세르비스 악시옹 부대였던 제11충격공수연대가 1993년 해체되면서 신설된 부대인 CPIS로 이적한 경우이다. [8] 핵잠수함 기지에 수시로 침투하여 기지에 대한 보안평가를 실시한다. [9] 구출작전이 실행되기 전 다수의 인질들이 처형되는 바람에 SAS와의 합동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10] 자유프랑스군 출신으로 제드버러 작전에 참여했던 유명한 대분란전(COIN, 대테러 작전과 대유격대 전술 등을 포함하는 전술) 전문가로 전장에서 포로에게 고문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62년 미국 포트베닝의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를 방문해 전술을 조언했으며 이는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전에서 피닉스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전역 이후에는 남미로 건너가 브라질, 칠레 등 극우 독재국가에 대게릴라 전술, 고문 기술을 조언하였다. 이후 천수를 누리다가 2013년, 95세로 사망했다. [11] 육군소속 특수전부대인 제1해양보병공수연대와 부대구호를 공유한다. [12] 부대형태가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짦게 11충격(Onzième Choc, 옹지엠 쇼-크)로 불린다. [13] 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 소설 자칼의 날에서 자칼을 고용해 샤를 드 골을 암살하려하던 단체다. [14] 실제로는 부대 전체가 아닌 소수의 장교들이 동조한 것에 불과했지만 11e DBPC가 프랑스 본토사정에 정통한 정보국 특수부대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최종적으로 해체가 결정되었다. [15] 아덴만과 인접한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지부티가 포함된 아프리카 지역 [16] 몇 년 뒤 사망한 특공대장이 페르피냥에 안치되었기에 CPIS로 추정된다. [17] 2013년 작전에서 사망한 신원미상의 포인트맨과 신원이 공개된 패트릭 흐부 대위 # 둘 중 한 사람으로 추정. [18] 수중전투훈련센터(Centre d'Instruction des Nageurs de Combat). 현 CPEOM의 전신부대. [19] 페레이라는 배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나 카메라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배에 들어갔는데, 하필 그 때 두 번째 폭탄이 터졌다. 이후 체포된 프리외르는 회고록에서 자신들은 사람을 노린 게 아니었다며 사람이 죽은 걸 알고 겁에 질렸다고 서술한 바 있다. [20] 체포된 알랭 마파르(남성), 도미니크 프리외르(여성)는 세르비스 악시옹 소속은 아니었으며 DGSE 공작요원으로, 폭탄을 직접 설치한 세르비스 악시옹(CINC)을 돕기위한 현지지원조로 현지에 파견되었다. 스위스인 관광객 신분으로 위장해 뉴질랜드에 입국해있던 상태였으며 작전을 위해 임대한 자동차 렌탈 증서와 사건현장의 지문으로 뉴질랜드 수사당국에 추적되었다. [21] 실제로 프리외르는 임신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프리외르가 폴리네시아의 군사시설로 이감된 직후 그의 남편이자 국방부 소속 직원이었던 조엘 프리외르가 폴리네시아로 발령받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22] 이 사건은 심각한 국제적 문제로 치달았고, 중재재판을 통해 합의를 보았다. 이 사건은 국제법의 위법성 조각사유 중 불가항력(force majeure)과 조난(distress)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판례이기도 하다. [23] 발각과 동시에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이 곧장 해당 반군에게 사격을 가해 제압하려 했지만 사격을 받은 반군이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는 바람에 침투가 발각되었다. [24] 특수부대 40명 대 반군 200명이면 해볼만 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근처에 반군이 얼마나 더 있을지도 예상할 수 없었으며 야간에 퇴각로가 한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중화기와 로켓포로 중무장한 반군 본거지에서 MP7, HK416과 같은 소구경 경화기로만 무장한 상태에서 그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가 없었으며 퇴각로가 막히고 포위를 당한다면 그대로 전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5] 신원이 발표된 미스트랄함에서 사망한 대원과 다르게 여전히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40살의 CPIS 상사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전역날짜도 미루고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요새화된 건물벽을 준비해간 사다리를 타고 몰래 기어올라가 안뜰에서 밖에서 대기중인 동료대원들을 위해 문을 열려고 시도하다 경비병에게 총상을 입어 사망했다고 한다. [26] 발각된 직후 세르비스 악시옹 대원이 드니 알렉스가 감금되어 있다고 예상된 건물 내부에서 기관총음과 섬광을 목격했다고 한다. [27] 프랑스 정부는 드니 알렉드가 억류된 2009년 이후 4년간 인공위성정찰, 신호수집을 통한 도청 등 다양한 수단으로 드니 알렉스의 거처이동과 동향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이들 수단으로도 작전이후 드니 알렉스의 어떠한 생존정황도 포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8] 고도로 훈련된 3명의 특수부대 대원과 반군 대원의 가치는 서로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살을 원했다면 함재기 폭격이나 미사일 등으로 두들겼을 것이다. 정부는 예산 못지않게 사상자 숫자에 민감하다. [29] 비슷한 일례로 국군정보사령부 특임대도 이러한 이유로 해체 및 통폐합 제안이 나왔었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2010년 초반 사이 부대 해체 검토까지 이루어졌지만, 결국 존치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30] Organisation armée secrète, 비밀군사조직. [31] 책에서는 SDECE 제7부로 언급됨. [32] 작중에 등장하는 OAS는 실존했던 조직이며 이들이 작중 초반에 실행한 드골 대통령의 암살 시도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SDECE는 세르비스 악시옹을 동원한 지속적인 도청과 감시로 국내와 해외에 은신한 OAS 인사들의 신원과 동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알제리 독립 직후 조직규모가 3,000명에 달했던 OAS는 세르베스 악시옹의 지속적인 감시와 방해공작으로 2,700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부상자를 냈고 점점 쇠퇴하여 1968년에 무력저항을 끝내고 프랑스 정부에게 사면되는 형식으로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