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林 李氏 (舒川 李氏) 서림 이씨 (서천 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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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colbgcolor=#fff,#222> 충청남도 서천군 |
원조 | 이익존(李益存) |
시조 | 이언충(李彦忠, 李彦冲) |
집성촌 |
충청남도
부여군,
논산시,
청양군,
보령시,
서산시 전라북도 익산시 |
인구(2000년) | 2,959명(서림 1,390명 + 서천 1,569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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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원
원조 이익존은 고려조초(高麗朝初)의 인물로서 충성양절익찬(忠誠亮節翊贊) 선위정원공신(宣威定遠功臣) 흥록대부(興錄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그의 18세손(世孫)인 세공(世公) 이천(李仟)은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지예부사(知禮部事)로 많은 공을 세워 서림군(西林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으로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랑(門下侍郞) 도첨의(都僉議) 전리(典理) 감찰대부(監察大夫) 평장사(平章事) 대장군(大將軍)이었다.
그 이천의 손(孫)인 20세(世) 이언충은 충선왕대(忠宣王代)에 공을 세워 충숙왕(忠肅王) 즉위원년(1314)에 서주군(西州君)으로 봉해진다. [1][2] 이후, 충숙왕 8년에 왕의 종제(從弟)인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심복인 조적과 모의해 충숙왕을 축출하려고 원왕연우(元王延祐)에게 참소하는 바람에 충숙왕이 북경에 5년간이나 억류당하고 옥새(玉璽)까지 약탈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때 원나라 왕을 설득해 1324년 충숙왕과 옥쇄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해, 그 공으로 충경공(忠敬公)과 단성수의공덕보리공신(端誠守義公德補理功臣) 벽상삼한상중내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都僉議) 좌우정승(左右政丞) 영경전사(領景殿事) 지효사관사(知孝思觀事)이자 서림군(서주군)에 봉해지며 서림 이씨의 시조가 된다.
2. 지명
서림은 현재 서천 지역의 옛 이름이다. 백제 때는 설림(舌林),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서림(西林)으로 고려8대 현종(顯宗)9년 가림현(嘉林懸)에 속했다가, 잠시 서주(西州)라는 지명으로도 불렸으나 조선(朝鮮)3대 태종(太宗)13년에 서천군(舒川郡)으로 개칭(改稱)되었다.이 때문에 동일 본관이나 서림 이씨와 서천 이씨로 나뉘어져 불리고 있으나.[3] 현재는 '서림(서천) 이씨'와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도록 한 상태이다.
3. 분파
- 부여공파(扶餘公派)
- 원정공파(院正公派)
- 판서공파(判書公派)
- 진사공파(進士公派)
- 부사공파(府使公派)
- 주부공파(主簿公派)
- 장의공파(掌議公派)
- 용학파(龍鶴派)
4. 항렬
21세 | 지(之)○ |
22세 | ○영(榮) |
23세 | 병(炳)○ |
24세 | ○철(喆) |
25세 | 종(鐘)○ |
26세 | ○제(濟) |
27세 | 동(東)○ |
28세 | ○희(熙) |
29세 | 준(埈)○ |
30세 | ○진(鎭) |
31세 | 해(海)○ |
32세 | ○식(植) |
33세 | 용(容)○ |
오행(五行) 항렬을 따르기에 항렬자가 되는 한자 안에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 글자가 로테이션 되도록 포함되어있다.
예를 들어 22세 영(榮)에는 목(木)이, 23세 병(炳)에는 화(火)가, 24세 철(喆)에는 토(土), 25세 종(鐘)에는 금(金), 26세 제(濟)에는 수(水)가 포함되어있는데... 오행 항렬의 특징은 오행 원칙에 따라 아버지(항렬의 부수자)는 자식(항렬의 부수)이 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형태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나무)는 화(불)이 잘 탈 수 있도록 해주고... 그 화(불)은 재를 만들어 토(땅)을 기름지게 만들어주는 식... 자세한 것은 오행 항목으로.
5. 인물
5.1. 고려시대
5.2. 조선시대
- 이흥의(李興儀) - 조선초기 문신. 세종29년 진사 급제.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 찬탈을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부여로 낙향했다가 같은 이유로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에 내려와있던 생육신 중 하나인 김시습과 의기투합하여 독락정(獨樂亭)을 지어 후학 양성에 몰두함.
-
이함림(李咸臨) - 조선중기 문신. 정유재란 시에 일본과 화의를 하자던 서애
류성룡에게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개기다가 병신년에 전라좌수영 소속 광양 현감을 하라며 쫓겨난다.[4][5][6]문제는 하필 그 시기에 그 분께서는 옥중에 계시고 전라좌수영에 앉아있던 건 그 개새끼였는데... 부친 이대인(李大仁), 형 이간임(李簡臨)과 광양수군을 통솔하다가 그 분께서 복귀하시기 전에 그만 세 부자가 전부 사망하고 만다.
5.3. 일제 강점기
5.4. 현대
6. 기타
시조인 이언충이 전의 이씨에서 분적했다는 설[7] 이 있으나 서림 이씨 측과 전의 이씨 측 모두 인정하지 않는 설인데... 이 문제를 살펴보면... 고려 때 이언충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해낸 가장 큰 업적은 원나라에 역류되어있던 충숙왕의 환국을 이끌어내 서주군(서림군)에 봉해진 것으로 이에 대해서 고려사에는 서림(서천) 사람 이언충이라 적혀있기에 이 인물이 서림 이씨의 시조인 이언충이라는 것은 확실하나... 전의 이씨 측에서 이언충을 자신들의 선조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건 이언충 묘지명에 적힌 '...선대는 전의현 사람이다.'라는 문구 때문이다...헌데 이언충의 작은 아버지인 이혼(李混)가 본래 전의 이씨였으나 공을 세워 예안백에 봉해지며 예안 이씨의 시조가 된 케이스처럼[8] 고려시대 때는 이런식으로 새로운 본관을 만들어 독립하는 분적이 많이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서림 이씨의 시조인 이언충과 전의 이씨 9세손 이언충이 동일인물이라는 설 역시 받아들일만 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분적을 해서 나갔다면 분적한 새 본관의 시조이기에 그쪽 본관을 따라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한마디로 이언충은 서림 이씨, 이혼은 예안 이씨이지... 분적을 한 이상 더는 전의 이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언충, 이혼의 경우처럼 이상하게도 포털에 등록된 전의 이씨 측, 역사적 인물에 이런 케이스들이 많다는 것... 그 때문에 전의 이씨 측에는 자기네 선조들 리스트에
연안 이씨에서도 앞서 설명한 사연과 비슷한 사연이 있는데 고려 공민왕 때 판삼사사를 지낸 공신 공량공 이수산에 대한 이야기다. 이수산은 고려사에 수안군 사람으로 기록 되어있어 많은 포털 사이트에서는 수안 이씨로 기록 되어 있는데 연안 이씨 측에서는 이수산이 수안 이씨가 아니라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족보에 있는데 수안 이씨의 족보에는 이수산과 그의 아들 이념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연안 이씨 대장군공파 보서엔 그는 물론 그의 후대까지 모두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이 곳을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가끔 서림이씨 족보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일부 인물들이 과거 시험을 볼 때 본관에 연안(延安)이라 적는 경우가 있었는데... 현재는 본관과 성씨가 중요하지만(족보 서열 관리 및 근친혼 금지 등의 이유로)... 고려시대 이전만 해도 성씨를 거의 쓰지 않았고
[1]
고려사(高麗史) 56권(卷) 지제십편(地制十編)에 기록.
[2]
본관이 전의(全義)인 이언충(李彦冲)과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사』 권73, 지27, 선거, 과목 선장(選場). 김용선 편저, 「이언충(李彦冲)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2.
[3]
2000년 인구조사 기준. 서림 1,390명, 서천 1,569명.
[4]
병신년 윤8월부터 정유년 4월까지
[5]
난중일기에 나오는 광양현감은 다음과 같다. 정유년 5월. 어영담(갑오년 4월. 죽다.) > 송전(갑오년 3월) > 김두검(김현)(을미년 5월) > 김성(병신년 1월) > 이함림(병신년 윤8월) > 고언선(정유년 5월) > 구덕령(정유년 8월)
[6]
이순신 장군께선 정유년인 1597년 2월 26일, 한산도에서 포박돼 한양으로 압송된 후 동년 3월 4일에 투옥되시며, 이후 약 28일간의 옥고를 치르신 다음 동년 4월 1일
백의종군으로
사면을 받으시는데 그 사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되는 인물이 바로
원균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옥문(獄門)을 나온 정유년 4월 1일부터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사망해 동년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되시는 때까지 약 120일간
백의종군을 하시는데 그 기간 동안인 정유년 3월
원균이 벌였다가 140여명이 희생된 거제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7]
『고려사』 권73, 지27, 선거, 과목 선장(選場). 김용선 편저, 「이언충(李彦冲)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2.
[8]
골 때리는 건 이 인물 역시 예안 이씨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포털 정보에는 본관이 전의 이씨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9]
특히 무과에서 본관을 자기가 사는 동네로 적는 경우가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