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17-06-18 22:24:48

서 린

생몰년: (1222 -1305)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고려 고종. 충수협모좌리공신


병부상서공파(감무공)파조


중조(中祖) 서린(徐鱗)이 처음 각동리 내등에 정착하면서

철야에 터를 잡았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중랑장(中郞將)을 거처 병부상서 대광내의령(兵部尙書 大匡內議令-종 1품)에 올랐다. 권함(權咸)의 모함에 영평(永平)(南平의 구호(舊號)) 로 내려오게 됐다

공은 영평감무를 역임후 철야(現 각동리 내동)에 정착함으로써 이천서씨 상서공파의 입향조가 되었는데 그후 후손들이 등내에 이거함으로써 주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11세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좌복야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 정 2품.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대광내의령.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철천사(哲川祠)는 고려 병부상서 본관은 이천(利川)인 서린(徐鱗)을 봉향한 사우로서 등내마을에 위치한다.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 휘(諱) 린(鱗)은 송가정(宋嘉定) 15년 임오(고종9:서기1222)년에 생하시어 고종조에 등제(登第)하여 중랑장(中郞將) 병부상서(兵部尙書)의 벼슬에 있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영평(永平)의 감무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를 개의치 아니하시고 부임하시자 혜궁관(惠窮館)을 건립하고 사궁(四窮)과 극빈자를 점열하여 의식을 해결해 주시고 오농법(五農法)을 시행하여 생계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

 

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유업관(儒業館)을 건립하여 매월 3인씩을 선발하여 한해에 한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여 출사(出仕)토록 하였으니 영평의 문물이 공으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속민이 숭불(崇佛)만 하고 보본(報本)할 줄은 알지 못한지라 제사예법을 가르쳐 조상숭배사상을 일깨워주었다.

 

도 어린애를 잉태한 부인들의 빈곤을 덜어주기 위하여 산미(産米)를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부임하신지 10년 만에 해임하시고 귀향하고자할 제 부락민전체가 늘어서 울면서 길을 막아서기도 하였다.

 

떠난 후에는 부락민이 초상화(肖像畵)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돌아오시기를 기원하였으나 끝까지 오시지 아니하니 후에 수충협모좌리공신(輸忠協謀佐理功臣)으로 받들었다.

 

충렬왕36년 을사(乙巳)에 졸하시니 향유(鄕儒)가 향선생(鄕先生)으로 추모철야(鐵冶)에 철천사(哲川詞)를 세우고 배향(配享)하다.

 

배(配)는 해남(海南) 윤씨(尹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