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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06:03:05

삼백산업

1. 개요2. 발전 배경
2.1.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2.2. 정부의 지원과 장려 2.3. 국제원조와 협력
3. 급격한 발전4. 쇠퇴 및 전환
4.1. 미국의 원조 감소로 인한 쇠퇴4.2. 다른 사업으로의 전환
5. 여담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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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0년대 당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공업이었던 제분(製粉), 제당(製糖), 면방직(綿紡織) 공업을 가리킨다. 이때 세 산업의 대표적인 원료가 밀가루, 설탕, 면화 등으로 모두 흰색이었기 '삼백산업'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 산업 모두 일상생활에 필요한 주요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이었기에 6.25 전쟁 이후 급증한 수요에 힘입어, 한국에 형성된 대자본을 대표했다.

2. 발전 배경

2.1.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국토의 기반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어 일제강점기 세워진 기반 시설의 대부분이 손실됐다. 일제강점기 산업화는 주로 북한 지역에서 이뤄졌고 남한 지역은 낙후되었는데 전쟁으로 더욱 망가진 셈이다.

전쟁 이전 대비 공업 생산량은 절반 이하로 줄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의 주력 산업이었던 면방직 공업 역시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이는 1950년대 전반에 걸친 극심한 물자난으로 이어지며 국가의 절대 빈곤이 50%에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시급한 경제 재건과 동시에 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야 했다.

2.2. 정부의 지원과 장려

당시 미국 일본을 통해 대한민국에 물자를 공급하려 했으나, 강경한 반일정책을 펼친 이승만 정부는 원조 물자를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는 구조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미국 입장에선 전쟁 특수로 경제호황이 찾아온 일본 경제를 강화하고자 세운 계획이지만, 한국 정부는 일본을 배제하고자 했다. 1954년 11월 ‘한미회담합의의사록’에 서명함으로써, 원조물자 조달에서 특정국을 차별하는 것은 금지된 이후에도 이승만 정부는 간접적 수단을 이용하여 계속 저항해나갔다.[1]

이승만 정부는 자체적인 공업 생산량 확보를 계획하게 된다. 인프라가 거의 전멸한 상황에서, 삼백 산업은 비교적 낮은 기술 장벽과 초기 투자 비용이 드는 경공업이자 소비재 자체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이었다. 즉, 전쟁 이후 낙후된 시설에서 단기간 내에 자급자족과 경제 안정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인 셈이다.

2.3. 국제원조와 협력

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의 원조는 밀, 원면과 같은 농산물 원조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모두 면방직 공업의 원료인 원면, 제당 공업의 원료인 원당, 그리고 제분 공업의 원료인 밀이였다.

미국의 원조가 농산물에 집중된 건 당시 미국의 농산물이 수요에 비해 과잉 생산되던 시기라서 그렇다. 미국 정부로선 국내의 잉여 농산물을 사들여서 대외 원조 물자로 활용하여 국내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한국 정부의 삼백산업에 대한 지원과 미국의 원료품 원조가 합쳐지면서, 이 세 산업은 원료를 값 싸게 들여오는 것을 넘어서 생산 설비까지 자금 지원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1950년대에 삼백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3. 급격한 발전

미국과 한국 정부는 생산 시설의 구축, 원료 조달, 그리고 독점적 판매 기회 제공과 같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삼백 산업을 지원하면서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생산재 공업이 없던 한국에서 공장 시설의 대부분은 외국산으로, 주로 원조 자금이나 정부가 보유한 달러로 도입되었다. 환율 면에서의 특혜를 포함하여 이러한 시설에 대한 지원은 삼백산업에 큰 이점을 제공했으며, 삼백산업은 정부와 미국으로부터 원료를 우선적으로 배정받았기에 원가를 절감함과 이윤까지 극대화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수입 관세와 물품세 인상을 통해 삼백산업의 국내 시장 독점을 지원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삼백산업은 국제 시세보다 싸게 생산해서 비싸게 팔 수 있는 매력적인 산업이 된 셈이다.

이렇게 고이윤 산업으로 거듭난 삼백 산업은 파격적인 성장을 맞아서, 기존에 1,000배럴이었던 생산량이 45,000배럴까지 늘어나게 된다. 이는 국내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다만 워낙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점과 시설이 크면 클수록 원조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배분 구조가 합쳐져서 성장세는 1950년대 내내 지속된다.

4. 쇠퇴 및 전환

4.1. 미국의 원조 감소로 인한 쇠퇴

1950년대까지 직접원조를 통해 여러 국가를 지원해주던 미국의 직접 원조 방식도 1960년대에 들어 바뀌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원조를 크게 줄일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국제협조형 원조로 바꿀 필요성을 느낀다. 이에 따라[2] 1957년부터 미국이 무상 원조를 크게 줄이고 유상원조로 대부분의 원조 방식을 전환하게 된다.

이는 곧 삼백 산업의 불황으로 이어졌으며 나아가 한국 경제까지 크게 흔들리게 된다. 원료를 미국으로부터 싼 가격에 원조받아 가공하는 방식이었던 만큼 미국의 원조 감소에 따른 원료비 상승은 이미 국내 수요를 넘어서 팽창해온 삼백 산업에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이후에 달러를 시장 가격의 절반에 이용할 수 있던 정부 혜택까지 없어지고 독점적인 배분 방식까지 전환을 맞으면서 더욱 침몰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 감소와 원재료값 상승의 상황에서 과잉 설비 문제는 치명적이었다. 생산성 향상 없이 설비를 확장한 결과, 비용 증가와 매출 정체, 자금 융통의 제한으로 인해 일부 업체들은 도산하거나 합병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한국 정부 차원에서 삼백산업을 지원했으나, 이전 미국 원조에 비해 규모가 작았기에 큰 효과는 없었다.

4.2. 다른 사업으로의 전환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원조 감소에 대비하고자 다양한 방식[3]으로 외화를 확보하여 기존의 경공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전환할 계획을 세운다. 이에 따라서 삼백산업은 이전과 같은 호황을 누리진 못하지만 해외 시장 개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변화를 계속해서 시도한다. 나아가 삼백산업의 기존 인프라가 1960년대 식품 가공업, 화학섬유공업으로 확장되며 산업구조 고도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5. 여담

1950년대 미국은 대만(중화민국)에도 농산물을 위주로 한 원조를 해주었으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 막대한 원조물자를 토대로 하여 면방직공업과 제분공업이 발전했다. 한국과 차이가 있다면 원당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는 것인데, 대만은 식민지 시대부터 이미 사탕수수 재배와 가공업이 크게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물자가 줄어들어 관련 산업이 어려움을 겪었고, 대만은 이 때부터 본격적인 산업화 정책을 시작한다.

6. 같이보기


[1] 정진성. 1950년대 일본의 특수(特需)와 냉전구조. 95P [2] 당시 대한민국의 1년 원조 규모는 최대 3.8억 달러로 당시 가장 많은 원조를 받던 국가 중 하나였다 -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1975년, p.210 [3] 베트남 전쟁 파병, 한일기본조약 당시 일본에서 보낸 '독립축하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