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2:36:39

사휘

古越南
고대 베트남 군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홍방 왕조 경양왕 | 웅현왕 | 웅국왕 | 웅희왕 | 웅휘왕 | 웅소왕 | 웅위왕 | 웅정왕 | 웅위왕 | 웅정왕 | 웅무왕 | 웅월왕 | 웅영왕 | 웅조왕 | 웅조왕 | 웅의왕 | 웅선왕
촉가 안양왕
남월 무제 | 문왕 | 명왕 | 애왕 | 조건덕
낙월 쯩 자매
사씨 정권 사섭 | 사휘
후조조 조국달 | 조구
전 리 왕조 전이남제 | 이천보 | 조광복 | 후이남제
매조 매흑제 | 매소제
풍조 풍흥 | 풍안
전양조 양청 | 양지열
쿡조 곡승유 | 곡호 | 곡승미
후양조 양정예
키에우조 교공선

}}}}}}}}} ||
시호 없음
성씨 사(士)
휘(徽)
베트남어 시 휘(Sĩ Huy)
생몰 년도 ?년 ~ 226년
재위 년도 226년

[clearfix]

1. 개요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이자 사섭의 셋째 아들로 교주 창오군 광신현 사람이다. 아버지 사섭이나 형 사지에 비하면 난폭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사씨 정권의 마지막 군주.

2. 생애

226년, 오나라에 충성을 바치면서 교주를 잘 다스리던 것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버지 사섭이 죽자 손권은 사휘를 안원장군, 구진 태수에 임명하고, 교위 '진시'라는 자에게 사섭의 임무를 대행하게 하고 교지 태수로 임명했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오나라의 움직임은 아버지의 땅을 날로 먹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여대가 상주를 올려 해남의 군을 3군으로 나눠 교주를 만들고, 대량을 자사로 임명하며, 해동 네 군을 또 나눠 광주를 만들어 여대 자신이 자사가 되도록 하니 사휘는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휘는 사씨 일족이 몇 대에 걸쳐 교주에 베푼 은혜를 믿고 교지 태수를 칭하면서 해구의 병사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지만, 같이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아버지가 천거했던 환린이라는 자가 신임 교주 자사 대량을 따르기를 청하자 성질이 뻗쳐가지고 주먹으로 때려죽였다. 이런 그의 행동에 환린의 형인 환치와 그의 아들인 환발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사휘는 이에 농성으로 맞대응해 몇 달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니 환치는 사휘와 협정을 맺고 돌아갔다.

한숨을 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무렵, 여대의 동오군이 생각지도 못한 신속한 진군으로 도착하자 사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여대는 먼저 편지를 보내 사휘를 타이른 다음 사촌 사광을 보내 지금 항복하면 군수 자리는 잃게 되겠지만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하자 사휘는 형 사지, 동생 사간, 사송 등 형제 여섯 명과 함께 웃옷을 벗어 맨살을 드러내고 항복의 뜻을 나타내면서 영접하니 여대는 사절한 다음에 옷을 입게 했다.

다음날 아침에 여대는 장막을 설치하고, 사휘의 형제 여섯 명에게 들어오게 했는데,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여대는 조서를 들고 사휘의 죄과를 차례로 진술하고, 그 말에 따라 주위에 있던 자들이 여섯 형제를 모두 끌고 나가 처형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통해 사휘의 머리를 무창에 보내니 후대의 인물은 물론 당대의 인물까지도 이 행위를 비난했다.

하지만 진수
사섭은 남월을 지키며 마음대로 하고 생을 마쳤지만, 그 아들에 이르러서는 신중하지 못하여 스스로 화를 초래했다. 아마도 평범한 재능으로 부귀함을 즐기고 험한 지세를 부지한 것이 그로 하여금 이 결과가 되게 했을 것이다.
라며 사휘가 스스로 화를 불렀다고 말했으며 교주, 즉 베트남의 입장에서 나온 《대월사기전서》에서조차 오사련이 사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세 번이나 했다.

첫 번째로는 사섭이 죽었을 때
"자식의 불초함은 곧 자식의 죄다."
라며 사휘의 못남을 깠고[1], 두 번째로는 환린을 죽일 때
예로부터 간언하는 신하를 죽이는 것은 망하지 않은 자가 아직 없었다. 진(陳)국은 설치를 죽였고, 제(齊)국은 고훤을 죽이니 진(陳)국과 제(齊)국의 일은 거울로 삼음이 옳다. 이로써 후세에 물려주고 경계하여, 마땅히 사휘와 같이 간언하는 신하를 죽임이 있으면, 왕통의 계승이 돌아서는 게 아니라 멸망에 이르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했으며, 세 번째로 사휘가 여대의 간악한 술수에 죽었을 때조차
사휘는 아버지가 훙서하고 명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났고 또 병사를 일으켜 명에 거역하였으니 진압하는 것이 옳고, 토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대는 사휘를 꾀어 항복하게 하고 나서 그를 죽였으니 옳지 못하다. 대저, 신의는 국가의 보배이다. 휘가 이미 항복하였는데, 포박한 뒤 목 베어 무창으로 보내었으니, 살리고 죽이고 하게 하는 것이 위(上: 국가, 임금)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인데, 위엄과 신의가 제대로 행해지겠는가? 아래(下: 신하, 백성) 역시 좋음이 없지 않겠는가?
라며 진압한 것은 당연했다고 평하고 있다.

3. 미디어 믹스

3.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317.jpg
삼국지 13, 14[2]

아버지 사섭과 마찬가지로 삼국지 6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교주가 나올 경우 사섭의 무장으로 나타난다. 사섭으로 플레이할 경우 부하가 모두 사씨 일가이기에 좋든 싫든 쓸 수밖에 없다.

삼국지 6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71/지력 61/정치력 39/매력 70으로 일기토 작전은 측면공격과 호통이 있다. 그리고 성장 유형이 신동이다.

신동도 제갈량, 방통, 강유 등 몇 안되는 능력자만의 성장 유형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거다. 그리고 234년을 배경으로 한, 그러니까 제갈량이 죽은 후인 통상 시나리오 7 오장원이 지는 별에서도 뜬금없이 생존했다. 자기 형인 사지도 나온다.[3] 수명이 길어서[4] 오래 굴려먹을 수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64/지력 44/정치력 31/매력 54에 특기는 징병, 화시. 총 2개 밖에 없는 약체 무장. 물론 위에도 언급했지만 사섭으로 할 경우 초반엔 어쩔 수 없이 얘가 주력이 된다. 사섭 세력이 사섭을 포함하여 장수가 5명 밖에 없는것도 있지만, 통솔력, 무력이 사씨 5인방 중에서 제일 좋기 때문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9/무력 64/지력 44/정치력 31. 특기는 훈련 1, 순찰 3, 견수 3, 수영 1이다. 병과적성은 창병 A/기병 C/궁병 C이고 전수특기는 순찰로 전법은 숙부인 사일과 마찬가지로 창공약화다. 수명이 63세로 길기 때문에 거의 모든 시나리오에서 등장한다. 능력치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그대로지만 창병적성이 무려 A기 때문에 사섭군에서는 그래도 전투에 나가야 한다. 음성은 무례.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9, 무력 66, 지력 44, 정치 31, 매력 52로 전작과 달리 무력이 2 상승했다. 개성은 견뢰, 공명, 주의는 아도, 정책은 학익강화 Lv 3, 진형은 학익, 장사, 전법은 화시, 매성, 강습, 친애무장은 없고 혐오무장은 손권이 있으며 전작과 달리 사망년도가 226년으로 변경되었다.

3.2. 삼국전투기

전투외편 1편에서 여대에게 토벌당하는 모습으로 1컷 등장.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 사섭의 패러디 때문인지 젠트라디 의상을 입고 있다.


[1] 이것은 사섭의 대에는 위세가 대단했던 사씨 일가가 바로 다음 대에 망해버린 것은 사섭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사휘를 까는 동시에 사섭을 옹호하는 말. 전체적인 뉘앙스로 보면 서술의 무게는 오히려 후자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사섭 문서 참조. [2] 14에서는 어째선지 사광이 이 일러스트를 쓰고 있다. [3] 실제로 사휘와 사지는 226년에 여대한테 죽임을 당한다. 코에이도 이런 오류를 범한걸 알았는지 삼국지 10에서의 사휘와 사지의 사망년도를 227년으로 해놓아서 그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4] 삼국지 6의 수명 최대 수치는 7인데 사휘의 수명 수치는 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