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5년 자유당이 발행한 책자.이승만 정권 하의 서울경찰국에서 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 일부 대학에서, 실물을 열람 할 수 있다고 한다.
책의 부제는 좌익, 중간, 제3세력, 기타로, 까놓고 말하자면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사찰결과를 종합해 기록한 일종의 실적보고서이다.
자유당의 공적을 강조하다 보니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서술이 많다. 1994년 민간에 공개되었다.
2. 왜 부각되는 일이 없는가?
좌익, 진보, 중도주의 정당에 대한 왜곡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걸 통해 자유당 정권의 치부를 합리화하기 때문이다.최초 발견 당시에는 1950년대 당시 존재했던 거의 대부분의 정당이 군소정당까지도 세분화돼서 적혀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인정받았으나[1] 내용이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문이나 연구주제로도 거의 선정이 되지 않는다.
3. 김구와 연관된 논란들
사찰요람의 내용 중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의 암살에 자유당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존재하였고 김구가 국가전복을 기획하고 있어,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 심판했다는 식의 내용이 존재한다.하지만 해당 책자에서 해설하는 김구의 과격한 행동은 일어나지 않은 일들 뿐이라 공신력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사료도 아닌데다, 그당시 신문이 보도한 김구의 활동내역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어 완전히 사장 되고 말았다.
3.1. 레베데프 비망록으로 검증?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인터넷상에서, 사찰요람은 <레베데프 비망록>을 통해 완벽한 교차검증을 마쳤다는 주장을 하는 자칭 재야사학자들이 나타났다.<레베데프 비망록>은 해방직후 소군정 민정사령관으로 재임했던 구 소련의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 소장이 남긴 200여쪽 분량의 일기로 1990년대 중반 국내 언론이 공개하였으며, 현대사 연구에서 중요사료로 인정되고 있다.
이들 자칭 재야사학자들은 사학계에서 중요사료로 인정되는 <레베데프 비망록>과의 교차검증을 통해서 <사찰요람>도 신빙성이 있는 자료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의 주장은 처음에는 받아들여졌으나, 곧이어 버림 받고 만다.
레베데프 비망록과 기타 자료에서 해당 자료와 일치하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교차검증을 통과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주장
애초에 이들이 주장하는 교차검증은 일치하는 자료하고 대조하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학계에서 현존하는 모든 자료와 대조, 평가를 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제 3의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고루 판단한 뒤에 해당 서술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이들은, 일치하는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검증받았다고 주장하는 환빠들의 논리를 내세웠고 얼마안가 밑천이 떨어져 버림받고 듣보잡으로 전락하고 만다.
4. 사찰요람이 사료로 인용된 경우
서울시경 사찰과에서 작성한 『극비사찰요람』에 의하면, 조봉암의 신당을 가리키는 자유사회당의 비밀서클 명단이 나오는데, 그 중 장해동(張海東:대한노총), 이규섭(李圭燮:전 인천노총 조직부장), 이덕명(李德明:농총 부산지회장), 김재순(金在順:노총 영등포부위원장), 서상빈(徐相彬:노련 감찰부장), 강홍(姜洪:농총 계몽대장), 안필수(安弼洙:노총부두노조 부위원장), 정용태(鄭龍泰:노총 간부), 김갑룡(金甲龍:노총 간부), 김흥철(金興澈:전 부두노조 위원장), 이일춘(李一春:자유노련赤崎 위원장), 계효천(桂孝天:농총 재정부장) 등이 노동조합이나 농민단체 간부들로 기록되어있다.595) 서울시경 사찰과, 앞의 책, 106~108쪽. 이들의 직함이 정확한지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1) 조봉암-진보당의 지지세력, 「조봉암과 1950년대(상)」
사찰요람이 인용된 경우는 극히 적은데, 인용된 경우에는 위와 같은 식으로 각 정당의 명단을 밝히는 부분이다. 각 정당의 인물들을 세분화시킨 것은 인명사전형태의 인용자료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정작 알맹이에 해당되는 해당 인물과 정당의 활동에 대한 신빙성이 없어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사찰요람의 존재 가치는 1950년대 당시 활동한
정당과 간부들의 명단뿐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5. 사찰요람의 한계
내용 자체가 엉망이다 보니, 사찰요람을 골자로 육군본부 정훈감실의 내용을 짜집기해서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많다.특히 김구를 엄청난 악당으로 묘사하는데 김구를 악당으로 묘사해봐야 부질없는 일이다.
한국 현대사의 인물중 김구만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 대해 심층있는 토론과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인물은 없다.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인 만큼 다양한 시각의 비판과 연구가 반세기에 걸쳐 이루어졌기에 독립운동가로서 밝은 면모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운용한 정치가라거나 요인암살등의 테러를 지시한 테러메이커로서의 어두운 부분까지 연구되고 토의된 바 있다.
그런데 갑자기, "베일에 감싸여있던 김구의 암흑면을 공개한다." 라고 사찰요람과 정훈감실의 자료를 짜집기해 떠들어봐야 먹히지도 않고, 사찰요람의 내용에 흥미를 느껴 탐구한 사람들에게 논파되고 있다.
5.1. 내용논파 - 희망의 물리학과 탄도학의 포병
사찰요람의 내용이 근거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내용중 인터넷이 된다면 인터넷 검색만으로 간단히 논파 할 수 있는 내용을 하나 기록한다.사찰요람은 김구가 이승만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김구는 어떻게 이승만을 암살하려 했냐하면, 영등포 포병대(사령관은 장은산 중령)에서
안두희를 시켜서(김구 - 김학규 라인의 지령을 받은 포병 소장 안두희가 포병대의 다른 세포들에게 지령을 전달) 경무대(청와대. 이승만 집)를 포격해서 죽인다는 엄청난 스케일의 계획이었다(...)
砲(포)의 성능에 대한 세밀한 질문에 대하여 영등포 포병대에서 경무대(청와대)나 중앙청(조선총독부)을 향하여 정확히 조준할 수 있다는 답변을 하자 심히 滿悅(만열:만족)함을 보고 (영등포와 경무대는 10Km 이상 떨어져있다)
김구가 영등포에서 포를 조준해 경무대를 맞춘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우선 지리를 살펴 보자.
영등포와 경무대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당산역에서 경무대까지는 약 10km(=10000m) 거리이다. 이 거리를 잘 기억해 두자.
다음은 당시 대한민국이 보유한 포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 전쟁 이전까지 국군 최강의 야포는 M3 105mm 경곡사포이다. 적어도 6.25 이전까지 국내에서 이것보다 강력한 포는 동원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 M-3포의 최대 사거리는 7584m. 유효사거리는 6526m에 불과하다.
위의 주장대로 김구가 영등포에서 포로 경무대를 부수는 암살을 기도했다면 김구측은 유효사거리를 스펙보다 3000m 이상 늘릴 수 있는 엄청난 포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위의 스펙을 기준으로 M-3의 유효 사거리를 산출해 보았다. 어떻게 계산해도 적어도 한강을 넘을 수가 없다. 계획이 사실이라면 무조건 한강을 넘어와서 쏴야 하는데 '그 당시 한강에는 한강 인도교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쏜다면 여의도 밑으로 돌아가서 인도교를 건넌 다음에 쏴야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걸 넘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단 그 당시 한국내에 M-3를 능가하는 포가 하나 있긴 한데 미군부대가 보유한 M-2포이다. 이걸 훔쳐다 영등포에서 경무대를 겨냥할수가 있을까?
이처럼 사찰요람 자체도 신뢰성이 없는 자료지만, 그걸 기초로 한 김구 관련 주장은 더더욱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포격 자체의 가능성만 보자면 포병학교가 창설 당시에는 영등포였지만 후에 용산기지에 주둔하였으므로 용산으로의 이전 이후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사거리상으로는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사격경로상의 여러 방해물을 피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오히려 김구 암살 범인이 바로 사찰요람에 직접 언급된 포병학교 출신 안두희인 마당에 그런 포병학교 출신 인사들이 김구의 경무대 포격 계획에 협조했다는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
[1]
사찰요람을 인용한 경우 인명사전의 형태로 각 정당의 존재 여부를 언급하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