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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1:02:08

사도마을


1. 개요2. 역사
2.1. 사도진2.2. 은행나무2.3. 장첨사
3. 민속문화4. 관련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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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금사리
사도마을
蛇渡마을 | Sado-village
<colbgcolor=#9F0807><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전라남도
기초자치단체 고흥군 영남면


1. 개요

파일:사도마을 망산.jpg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사도(蛇渡)라는 지명은 마을 뒤 망산 지형이 뱀의 머리를 닮아 붙여졌다.

바로 앞에 와도(蛙島 개구리를 닮은 섬)라는 섬이 있는데 뱀이 개구리를 내려다 보는 형상 같아 보인다고 한다.

2. 역사

최초 기록은 1789년 점암면 사도리(蛇渡里)로 표기되어있고 1912년 행정구역 일람에도 사도리로 표기 되어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초기 행정구역 폐합시 사도리와 능정리를 합쳐 금사리가 되었다가 광복 후 사도마을로 분동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이 되었다.

고려 충선왕대에 경남 창원 황씨가 처음 정착해 터전을 닦았고 이후 충주 지씨, 김해 김씨, 현풍 곽씨, 경주 정씨 순으로 입향해 마을을 이뤘는데, 일대 씨족 중심의 부락들과 달리 조선시대 군사기지였던 영향으로 많은 성씨들이 정착해 살아왔다 전해진다.

조선 세종 9년(1427년) 설진한 수군 군사기지 사도진성(蛇渡鎭城)이 있었다.

2.1. 사도진

사도진성의 축성을 위해 고흥을 비롯 인근지역까지 동원령이 내려졌다. 당시 구례에서 살던 한 남자가 있었는데 임신한 아내가 아이를 낳는 것도 조차 보지 못한채 축성에 동원돼 사도진성을 쌓는 동안 아이가 태어나 성장해 10살 무렵 아버지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10년만에 만난 부자는 서로를 얼싸 안고 한없이 울었고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슬피 울며 성을 쌓지 않자 이 두 부자를 성돌 속에 넣고 성을 쌓도옥 지시해 축성을 재촉했다 전해진다.

사도진성 축성 기간에 대해 몇년이 걸렸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위 설화를 미뤄봤을 때 축성에 최소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추측된다.
이순신장군의 『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사도진에 대한 기록
임진년(1592) 2월 24일,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마북산 밑 사량에서 배를 타고 부지런히 노를 저어 사도에 도착하니 흥양원이 벌써 와 있었다. 전선을 점검하고 나니 날이 저물어 여기서 묵기로 하렸다.
임진년(1592) 2월 25일, 여러가지 전쟁 방비에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붙잡아 들였으며, 교수(첨사 밑에 있는 벼슬아치)는 내보냈다. 다섯포구 중에서 방비가 제일 잘 못 되었는데도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하지도 못하니 참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거세게 불어서 배가 떠날 수 없어 머물러 잤다.

임진년 5월 사도 첨사 김완은 사도 함대를 이끌고 전라좌수영 함대의 우척 후장이 되어 옥포해전에서 선봉으로 나아가 적정을 탐지하고 신기전(신호에 사용하는 폭발하도록 만든 화살)으로 상황을 이순신 장군에게 알려 작전수립에 공헌하였으며 왜군의 대선 1척을 당파 소각하는 전과를 올렸다.

임진년 6월 사천해전에서는 왜의 누선대각(樓船) 여러 첛을 당파 소각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어 당포해전에서 순천부사 권준 함대에서 바다에 떨어뜨린 왜장을 사도진의 군관 진무성(당시 27세, 두원면 신송리 출생)이 재빨리 달려가 목을 베어 왜군을 큰 혼란에 빠뜨렸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율포해전에서는 왜군 대선 1척을 노획하였고 임진년 7월에는 우부장이 된 첨사 김완이 사도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해전에거 왜대선 1척을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임진왜란 3년째인 갑오년 3월 당포해전에서는 이웃 여도 함대와 연합하여 왜 중선 1척을 당파 소각시켰다.

정유년(1597)에 첨사 김완은 원균의 조방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나 불행히 패전하여 홀몸으로 불에 빠져 일본까지 잡혀갔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적의 소굴을 탈출해 돌아왔다한다.

원균이 패하고 120일여간 백의종군 했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다시 돌아와 수군을 재건 한 후 장흥부사로 있던 황세득(이순신의 처 종형)이 사도 첨사로 임명된다.

무술년(1598) 11월2일 출전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배신한 명나라 장군 유정과 연합한 수륙협공작전에 참여한 사도 첨사 황세득이 전사하였으며 이순신을 도와 끝까지 싸우며 용맹함을 날린 사도함대였다.

사도진은 임진왜란 전후로 전라좌수영 다음가는 수군기지 였으나 고종 32년(1895) 각도 수영 및 각 진영 제도가 폐지 됨에 따라 폐진되고 말았다.

정조 13년(1789) 마을을 전소 시킨 큰 불로 사도진성에 대한 기록과 유적들이 대부분 유실 되었고 현재 사도진성의 일부분이 서문(교회)에서 해구통으로 연결된 언덕배기에 남아있고 교회를 등지고 북으로 이어져 내린 동편 언덕에 드믄드믄 남아있다.

2.2. 은행나무

파일:고흥군 영남면 사도마을 은행나무.jpg

사도마을은 옛부터 터의 기운이 좋아 주변에 숲이 울창했는데 일제강점기 말 '사도마을의 기운이 번성하면 큰 인물이 난다.'하여 나무들을 모두 잘라 앞 바다에 수장시켰다. 다만 1000년 된 은행나무 만큼은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보호해 살려 내었고 이 일이 일본 순사의 귀에 들어가면서 동존회라 불렸던 이장이 광주병참소 까지 끌려가 죽도록 곤장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1997년1월호 제10호 재경금사향우회』 소식지 中 발췌
세월은 휘감아 모난 듯 둥글구나.
고려와 조선을 살갗으로 둘러 놓고
오늘 이날까지 변방에 서 있구나.

누가 일러 너를 알겠는가.
보릿단 쇳똥에 옛 친구는 가버리고
별마당 샛바람을 홀로 맞고 있구나.

세상이 다 아는 용문사 은행나무
너와 경주면 아무것도 아니드라.
천하의 고목중에 미목이 누구겠나.
사도 은행나무 너가 바로 제일이라.

2.3. 장첨사

장첨사가 모셔진 제당(당고)에 대해선 두가지 설이 있다.

첫째, 사도진성에 장씨 성을 가진 첨절제사(僉節制使, 첨사)가 사람이 부임하여 배고픈 이들에게 양식을 눠주고 아이를 난 사람에게 미역을 나눠주는 등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장첨사가 죽은 뒤 이를 기리기 위해 당제를 세웠고 섣달 그믐 밤에 당제(당고)를 모셨다.

둘째,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고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이장이 제주가 되어 섣달 그믐밤 제를 모신다. 신의 영정은 딸 소조 아지씨(小組 阿只氏), 부 삼살제왕(三殺帝王), 모 용대부인(龍大夫人)의 삼신이 있는데 제주의 잔은 딸에게 먼저 바친다. 왜구들이 마을에 들락거리며 만행을 저지르고 노락질을 일삼을 때 아지(阿只)라는 처녀가 목숨을 바쳐 마을을 구했다. 아지의 부친은 당시 사도첨사였으며 외동 딸만 두고 있던 지라 첨사의 관저(동헌) 뒤 언덕에 제당을 지어 딸의 영혼을 달랬고 첨사 내외가 죽은 후에는 이들을 신격화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한다. 혹자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무속신앙의 제당이라고도 한다.

3. 민속문화

사도 아리랑 『1996년9월호 제8호 재경금사향우회』 소식지 中 발췌
오동도 우라이섬 사람 살기는 좋아도 뱃놈들 새벽밥 해주기 나는 못 살것네. 사두나 능정은 사람 살기 좋아도 점심 바꼬리 이고 댕기기 나는 못 살것네. 패랑산 몰랭이 비오나 마나 어린 서방 품안에 잠자나 마나 아리랑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4. 관련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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