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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22:36:57

부활절 공세

Chiến dịch Xuân – Hè 1972
Easter Offensive

부활절 공세
베트남 전쟁의 일부
날짜
1972년 3월 20일 ~ 10월 22일
장소
베트남 공화국 전역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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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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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틀:깃발|]][[응우옌반티에우|]]
[[틀:깃발|]][[틀:깃발|]][[리처드 닉슨|]]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 후안 람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응오 쾅 트룽으로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응오 두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응우옌 반 토인

[[베트남 공화국|]][[틀:국기|]][[틀:국기|]] 응우옌 반 민
파일:베트남 국기.svg 레주언
파일:베트남 국기.svg 레 트롱 탄
파일:베트남 국기.svg 트랑 반 트라
파일:베트남 국기.svg 호앙 민 타오
결과
베트남 공화국 영토의 10% 장악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 주력 궤멸
베트남 민주 공화국 평화 협상 복귀
병력 베트남 공화국군 75만 명
미국 해군
미국 공군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 30만 명
피해규모 1~3만 명 이상 전사 미국 측 주장
최소 4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 전사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부활절 공세 이후6.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부활절 공세(Mùa hè đỏ lửa / Easter Offensive)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기 3년 전인 1972년 부활절 기간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호치민 루트를 통해 형성된 전선과 DMZ를 따라 대공세를 전개한 작전이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했던 구정 공세 이후 최대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작전이다.

2. 배경

구정 공세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던 린든 존슨은 차기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그 뒤를 이어 1969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당선되었다. 그해 9월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레주언(Lê Duẩn)’이 북베트남의 지도자가 되었다. 닉슨의 대통령 당선과 호치민의 사망 이후 베트남 전쟁의 전개도 점차 변화가 생겼다. 1969년부터 미국은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며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리처드 닉슨은 당시 소련과 대립 중이던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은 헨리 키신저와 함께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만나 회담을 가진 뒤, 훗날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국교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와 같은 닉슨의 외교정책은 남베트남의 응우옌 반 티에우의 정권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북베트남의 하노이 정부 또한 긴장하게 만들었다.

레주언의 북베트남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소련과 중국이 베트남을 둘로 나눈 제네바 협정을 호치민에게 서명하도록 강요했던 20년 전의 경험을 잊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하면 중국의 지원이 줄어들 것을 우려했다. 거기다 리처드 닉슨은 마오쩌둥과의 만남 이후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가 소련의 수상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만나 양측 간의 긴장을 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북베트남은 이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전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레주언은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전통적인 재래식 전쟁을 이용해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도전을 함으로서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로 했고 그렇게 해서 전개한 것이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다.

3. 전개

부활절 공세는 1972년 3월 30일에 시작됐다. 이 공세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14개 사단과 26개 독립연대나 되는 대규모 병력과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700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했다. 이는 1968년 그들이 일으켰던 제1차 ‘구정 공세’ 때 보다 더 많은 병력이 투입됐다. 부활절 공세의 공격은 크게 3군데에서 전개됐다. 당시 북남베트남이 맞대고 있던 비무장 지대(DMZ) 호치민 루트가 연결되어 베트콩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인근지대였다.
파일:2848948.jpg
중국과 소련으로 부터 지원받은 북베트남군의 전차들

부활절 공세 초반의 전세는 북베트남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적잖은 남베트남의 연대 병력이 캠프 캐럴에서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했다. 북베트남군은 신속히 꽝찌성(Quảng Trị)을 공격했고, 중부 고원지대를 가로질러 남베트남을 거의 반으로 나누었으며, 캄보디아의 국경을 따라 남베트남군을 넓은 지역에서 포위하기 위해 수도 사이공으로 향했다. 쾅찌성을 방어하던 남베트남군 전방 사단들이 지리멸렬하게 후퇴하고 그대로 탄약과 무기들을 파기도 안하고 유기해버리는 난장판의 상황이라 전선 붕괴는 시간 문제였다. 남베트남군 20기갑연대가 미국으로 부터 도입한 최신예 M48 전차로 북베트남군 전차들을 저지해 방어하는데 성공했으나 결국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했다. 5월 1일에는 꽝찌가 함락되고 성도인 후에 함락도 가능해졌다.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부활절 공세에 제대로 대응할 능력이 없던 남베트남군은 완전한 패배에 직면해 보이는 듯했다. 거기다 1969년부터 단계적으로 철수를 감행했던 미군은 그 당시 60000~9만 5천 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 중 소수만이 실전 부대였으며, 지상군은 거의 다 철수한 시점이었다.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지금은 당황하면 안 됩니다. 어떤 면에선 행운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벌을 주어야 합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남베트남군의 붕괴는 얘기하지 말게. 이건 그것보다 훨씬 판이 큰 거야. 소련, 중국 그리고 선거가 개입된 판이라고. 남베트남군은 붕괴하면 안 되네.
부활절 공세 당시 백악관 녹취록

남베트남군이 사실상 궤멸할 위기에 놓이자 이는 닉슨 정부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 앞에 남베트남군과 미군은 일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지켜만 볼 수 없었고, 또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특히 미국의 닉슨정부가 그러했다. 미국 대통령 닉슨은 결국 공군력을 동원한 작전을 허용했다. 바로 라인배커 작전이다.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하는 대규모 공습과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하이퐁 인근의 시설들에 대한 B-52 폭격기의 출격을 명령하면서, 특별방송을 진행하며 “하노이는 필요로 하는 무기와 보급품을 지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군은 진격해오는 북베트남군에게 격렬한 폭격을 가함과 동시에, 전면 폭격을 재개하고, 5월 8일에는 북베트남 기뢰 봉쇄조치까지 내렸다. 미공군과 미해군항공대는 손쉽게 개활지에 노출된 북베트남군 야전 병력들을 폭격했으며 북베트남 영내의 주요 목표물을 제한 없이 폭격하는데 성공했다. 그 덕에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은 크게 급감했으며 북베트남군 주력 병력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궤멸당했다. 이러한 전세 역전을 틈을 타 남베트남군은 반격을 했고 북베트남군은 적화통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한국군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콘툼 지역에서 기동로 개척을 위해 작전하면서 북베트남군 정규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한국군도 북베트남군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피해를 입었지만 기동로 개척과 주변 감제고지 장악이라는 목적을 달성해 승리를 거뒀다. 당시 미군의 주력 전투병력들이 철수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여전히 남아있는 한국군 병력들이 미군의 공백을 채워야 했었다. 한국군 기갑연대 1개 중대가 퀴논 방어를 위해 파견가기도 했으며 당시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 이세호 중장은 미군의 요청에 따라 콘툼 패스 개통 작전 투입에 9사단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남베트남군의 반대로 작전은 실시되지 않았다고 한다. # [1][2]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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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동원된 미공군기

막강한 미군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공세는 1972년 7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부활절 공격의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남베트남의 '안록(An Lộc)'이라는 지역에서 펼쳐졌다. 이 지역은 사이공으로 향하는 13번 고속도로가 있는 도시로 사이공에서 사실상 직선으로 96km 떨어져 있었다.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북베트남의 군대가 남베트남군 수비대를 상당한 압박을 가했지만, 병력 증강과 재보급을 위한 반복적인 노력은 실패했다. 거기다 미공군은 B-52 폭격기를 비롯한 공군력을 동원해 남베트남군을 지원했다. 그 결과 미군의 막강한 공군력은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약화시켰고, 1972년 7월 중순에는 북베트남의 재래식 무기를 앞세운 공격은 미국의 공습 앞에 결국 무력해졌다.

부활절 공세 기간 동안 총 300명의 미군의 전사했고, 남베트남군은 총 100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공세를 감행했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4만 명에서 7만 5천 명 정도 전사했고, 250대에서 70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장갑차가 파괴되었다. 즉 부활절 공세 또한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당시 다른 전투들처럼 사상자 측면에서 미군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5. 부활절 공세 이후

부활절 공세 당시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공군력으로 저지하면서, 북베트남의 주요도시들을 폭격했기에, 북베트남의 각 도시들 또한 많은 피해를 받았다. 그리고 미군 또한 큰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채 공세를 멈췄다. 즉 양측 모두 전쟁의 승리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사실 북베트남의 목적은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북베트남의 목적은 무력의 균형을 1968년 구정 공세 이전 수준으로 돌려놓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종전이 굳어지기 전에 보다 많은 수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진군시켜 유지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부활절 공세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부정부패한 남베트남군의 병력으로는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사이공 정권은 증가하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남부에서 쫓아내지 못했다.

북베트남군은 10만에 달하는 피해를 낸 대가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최북단의 4개 주(꽝찌Quảng Trị, 트아 티엔Thừa Thiên, 꽝남Quảng Nam, 꽝틴Quảng Tín) 중 절반을 영구적으로 차지하였다. 또한 남베트남 제 2군단과 3군단 관할 구역의 서쪽 주변부도 차지하였다. 북베트남은 이번 공세에서 그들이 얻은 바를 즉시 활용하였다. 그들은 이웃의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걸친 자신들의 보급로(호치민 루트)를 다시 늘렸다. 또한 공세 초기(3월 31일)에 점령한 동하(Đông Hà)의 항구의 하역 능력을 급하게 늘렸다. 이후 1년간 남베트남의 전장으로 수송된 군수물자의 20% 이상이 이 항구를 통과했다.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을 다시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미군 없이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군대와 남베트남 사회 전체를 덮었다. 미국에서도 닉슨의 '남베트남화' 정책에 의문을 표했다.

부활절 공세 이후인 1972년 여름 베트남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미국은 1972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한 마지막 대규모 공습인 ‘제2차 라인베커 작전’이라는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고 난 뒤, 1973년 1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완벽히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2년 후, 이미 미군이 사라지자 오합지졸이 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격에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통일당한다.

6. 참고 문헌



[1] 당시 한국군과 남베트남군 사이는 매우 안좋았다고 한다. # [2] 1972년 6월 콘툼성 전투를 지휘했던 존 폴 밴이 여기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