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원주 변씨 |
출생 | 1890년 5월 3일 |
황해도
봉산군 영천면[1] (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구천2동)[2] |
|
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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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변응찬은 1890년 5월 3일 황해도 봉산군 영천면(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구천2동)에서 태어났다.1920년 평안북도 의주군· 선천군· 철산군· 용천군 등지를 거점으로 하는 무장독립부대 보합단(普合團)이 창설되자 가입하였으며, 이 사이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참모 장승조(張承祚)와 접선했는데, 그의 지령으로 임시재무부원이 되어 국내에 파견되었다. #
이에 그는 1921년 5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이자 보합단원으로서 동지 김기국(金基國)[3] 등과 함께 정주· 안주 등 평안북도 일대에서 친일 부호를 살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관헌 및 밀정을 공격, 살해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
이들은 상하이로 가던 중 그해 10월 13일 동지들과 함께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안동현(安東縣) 삼도낭두(三道浪頭)[4]에서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1922년 5월 신의주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강도·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6월 28일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5]
이후 미결 기간을 합하여 총 3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뒤 1925년 2월경 출옥하였다. 출옥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은 자료 미비로 알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봉산군 영천면 신촌·묘동·양암동 → 1914년 봉산군 영천면 구천리 → 1918년 봉산군 사원면 구천리 → 1929년 봉산군 사리원면 구천리 → 1939년 봉산군 사리원읍 구천리 → 1945년 봉산군 사리원면 구천리 → 1947년 사리원시 구천리 → 1952년 사리원시 상매리·신양리 → 1954년 황해북도 사리원시 구천리 → 1955년 황해북도 사리원시 구천2동
[2]
원주 변씨 집성촌이다.
[3]
김기주(金基周) 또는 전기국(全基國)이라고도 한다.
[4]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전싱구(振興區) 랑터우진(浪頭鎭).
[5]
공소 결과는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기각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