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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9 20:00:27

법치


1. 개요2. 용어3. 배경4. 내용5. 영향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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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8F8FF> 유가 공자 자하 맹자 순자
묵가 묵자
도가 노자 장자 양주 열자
법가 이회 오기 신불해 상앙 한비자 이사
명가 혜시 공손룡 등석
농가 허행
병가 사마양저 손무 손빈 울료
불명 고자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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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법치는(法治) 고대 중국의 법가에서 주창한 정치사상으로 통치자가 법의 권위를 이용해서 지배를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유가 공자의 덕으로 다스린다는 덕치(德治)와 순자의 예로 다스린다는 예치(禮治) 사상에 반발하여 등장했다.

다른 제자백가들의 사상은 물론, 법가가 제시한 개념들 중에서도 사실상 유일하게 유가에 의해서 받아들여져 부분적으로나마 존속하게 되는데, 이로말미암아 동아시아 정치사상의 한축을 이루며 현대까지 영향을 줄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된다.

근대서양에서 등장하여 현대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된 법치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헌법이 공교육 교과과정에 포함되기 이전에 태어난 90년대 이전의 한국인들은 법치주의를 법가의 법치의 의미로 이해한다.

2. 용어

-치(治)라는 용어들은 당대에는 쓰인적이 없고, 후세에 학문상 정립된 용어다. 법가는 스스로 법치라하지 않고, 법(法)이라고만 불렀다. 마찬가지로 공자나 순자도 덕치, 예치라 하지않고 그저 외자로 덕(德), 예(禮)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법가는 법(法)을 군주의 도구로 파악했기 때문에, 유가의 덕이냐 예와 같이 단독적으로 추구되어야하는 가치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법치(法治)라는 용어 자체는 후세의 유가에서 법가를 비판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3. 배경

법가 공자 이후 유가(제자백가)에서 주류를 차지했던 복상 계열의 학파에서 공부하다가 나온 사람들이 이끈 것으로 보이는데, 복상의 특징은 (禮)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예라는 것은 사회 상하계급과 그 역할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피지배 계급은 지배계급에게 제아비와 같이 복종하고, 존경해야하지만, 지배계급 또한 피지배 계급을 제자식과 같이 아끼는 관계를 형성해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순자에 이르면 교육을 통해서 규율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다만 유가에서는 어디까지나 공자의 덕치(德治)가 기본이되고, 그 위에서 예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법가의 사상을 이끈 상앙 한비자는 덕치(德治)에 관해서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공자가 말하는 타인을 감화시켜야 한다느니하는 주장을 이상주의 또는 심지어 정치적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예 덕을 배격하고 법을 통한 규율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4. 내용

상앙의 경우에 법치란 지배자가 하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서, 피지배자가 이를 따르도록 훈련시킨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중요했던 것은 지배자가 하는 그 어떠한 약속도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부분이다. 실제로 상앙은 터무니 없는 약속을 하고서는 그것을 지킴으로써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 일화로 유명한 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에서 나무 기둥을 하나 놓고 그것을 옮기면 대저택을 내린다고 약속을 했던 부분이다. 사람들은 이 약속을 터무니 없게 여겨서 아무도 나서지를 않았는데, 한사람이 속는셈 치고 옮겨놓자, 상앙은 그대로 그에게 약속한 큰 집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후로 백성들은 상앙이 하는 어떤 정책도 진지하게 따랐다고 한다.

법은 구체적으로 상벌()로 이루어졌다. 벌칙+포상 규정만으로 이루어진 원시적인 법의 형태였다. 대신에 상과 벌을 매우 세밀화하는 방법으로 규율하고자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급(首級)을 통한 작위제도이다. 간단히 말해서 전쟁터에서 적의 목을 가져온 개수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계급이 결정되었다. 반면에 그 사람이 죄를 지으면 이 작위를 한단계씩 낮추는 것이 중요한 처벌방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러한 제도를 사용하는 진나라와 대적해서 군대를 이끌었던 위나라 장군 오기는 진나라 병사들이 용맹하기는하나 (수급에 욕심이 많아서) 유인에 쉽게 걸린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비자는 상앙의 생각을 조금 더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지방에 세력이 강한 귀족들을 어떻게 군주가 통제하느냐 였는데, 그는 법치가 그 해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한비자의 논리는, 군주가 그 어느 신하의 편도 일방적으로 들지 않으면, 권신들은 서로 견제하는 균형상태에 머물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상태에서 군주가 법으로 국정의 방향을 정하면, 신하들은 누가 법을 더 빨리 잘 따르느냐는 경쟁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비자는 예전의 선대군주들의 전통을 인용하는 방법으로 지금의 법이 전통을 가지도록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위를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다. 예전의 왕들도 하던 전통이니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너희도 따르라는 것이다. 서양 법학의 관습법의 개념과 비슷하지만. 관습법은 전통을 이용해서 피지배자(봉건귀족)의 권리를 지키는데 주로 이용된 반면에, 한비자는 어디까지나 군주에게 유리한 전통만 법으로 따르게 만들었다.

5. 영향

상앙과 한비자가 고안한 법치는 잘 맞아떨어져서 이를 받아들인 진(秦)나라의 군주들은 중앙집권화된 절대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고대 중국은 봉건사회에 종지부를 찍게된다.

이후로 진나라가 멸망하면서 법가도 같이 몰락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법치라는 개념은 천하를 장악한 유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이는 매우 특수한 경우였는데, 유가는 제자백가의 대부분의 정치사상을 모두 이단(異端)이라고 칭하면서 배격했기 때문이다. 사실 법가에는 법치 말고도, 술(術)과 세(勢)라는 개념도 더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정치적 기술과 힘으로 군주가 권력을 장악해야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유가의 군주의 덕으로 신하들을 감화시켜서 따르게 만든다는 덕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하여 버려졌다. 반면에 법치라는 개념은 유가 내부에서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예(禮), 그러니까 군주 중심의 계급의 질서를 구체화하고, 지키는 수단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덕택에 법치는 당당하게 살아남아서 동아시아의 정치사상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개념이 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법치냐 덕치냐하는 논쟁으로 이어졌다. 한나라 때 부터 덕치가 우위에 놓고, 법치가 보조한다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상앙의 수급제에서 볼 수 있듯이, 법치에는 성과주의가 계급에 우선한다는 개념이 들어있었다.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계급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사상은 사실상 법치가 유일했다. 유가의 인사제도는 쉽게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고는 했기 때문에, 유가가 타락할 때마다 법치는 그 안티테제로 평민 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현대 중국공산당의 경우 내부적으로 법을 강조하는데, 이를 볼 때 중국인들은 법이냐 덕이냐하는 2000년 이상된 논쟁의 틀로 여전히 정치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학자들도 중국의 정권들을 유가 성향이냐, 법가 성향이냐 분류하는 접근을 즐겨사용하는데, 대부분 중국공산당을 법가적인 정권으로 분류한다.

6. 평가

법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유가에서 이루어졌는데, 주로 그 폭력성과 도덕성, 안정성을 문제삼았다.

법치가 실제로 시행된 진나라 경우 법이 매우 혹독하게 시행된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신체 절단하는 등 처벌의 강도도 높은데다가 빈도 또한 높아서 백성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게다가 현실에 있을 수 있는 예외적인 억울한 상황에도 일관되게 법의 집행을 고수해서 법을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어떻게든지 상황을 피하는데 급급한 수동적인 상태로 백성들을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군주와 그 법에 대한 공포심만 있을 뿐, 애국심이 전혀 생겨나지를 않았다는 부분이다. 때문에 법이 집행되는 동안에는 모든것이 잘돌아가는 듯한 완벽히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지만, 일단 조금이라도 혼란이 생겨서 통치력에 문제가 생기면, 각설탕 같이 빠르게 사회가 붕괴되어버렸다. 사회란 구성원들이 서로와 공동체를 아끼는 마음 위에서 유지 된다는 유가의 시각이 맞아떨졌던 것이다. 법치를 시행한 진나라의 몰락으로 이후로 중국은 유가가 완전히 지배하는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반면에 법치를 옹호하는 현대의 의견 중에는 덕치가 사실상 봉권귀족에게 절대 유리한 반면에, 법치는 봉권귀족을 평민과 단지 몇 단계 작위 밖에 차이가 없게 둠으로써 계급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능력주의로 사회를 재편했다며 높이평가하기도 한다. 잔혹하고, 엄격한 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도 이전에는 인맥으로 용서받고 빠져나가버리던 귀족들이 법치로 인하여 평민과 똑같이 처벌받게된 상황에 반발한 것이 역사서에 주로 쓰여져서 전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귀족을 평민과 똑같이 엄단하는 것은 진나라가 선진적이었다고 볼면은 분명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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