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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18:37:50

배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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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2년 1월 3일
충청남도 논산
사망 1926년 11월 2일
묘소
본관
가족
학력
서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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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 생애

1882년 1월 3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 입암리(立岩里, 현 계룡시 두마면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지역의 유지이자 자산가인 부친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농촌 자력갱생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고, 평소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4월 1일 논산군 두마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 두마면 두계리(豆溪里) 두계장터에서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주도자가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장날의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산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이 오후 6시경 만세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던 만세시위대의 앞을 막아서며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만세시위의 중심 인물을 찾고 있던 다카노 다쓰이치(高野達一) 순사에게 시위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순사주재소로 동행을 요구받았다. 이에 다카노 순사의 요구를 거부하고, 침략자 일제를 규탄하며 그를 구타하였다. 이 모습을 목격한 가네코 미네키치(金子峯吉) 순사가 다가와서 다카노 순사에 대한 구타를 제지하자, 가네코 순사도 구타하여 일제 경찰들의 체포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그 후 주위에 있던 100여 명의 군중에게 “지금부터 내가 주창자가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려고 하니, 모두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하라”라고 외치며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사기가 오른 시위대는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두계장터의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일부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의 상징이었던 호남철도(湖南鐵道)의 철로를 파괴하여 열차를 탈선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모진 조사를 거친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