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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10월 14일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 |
사망 | 1945년 8월 15일 (향년 50세) |
베이징형무소 | |
가족 |
동생 박진목 배우자 아들 박희규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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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894년 10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해 의정원 의원에 선출된 후 감찰원으로 발탁되어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무를 무사히 수행한 후 상하이로 건너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바친 후, 그는 임서정부에서 활동했으나 임시정부가 점점 쇠락해지자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신간회 동경지회의 조직 결성에 참가하여 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28년 2월 동회의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되어 민족정신 고취 내용의 격문 등을 살포하며 활동하였다.1929년 신간회 동경지회가 와해된 뒤 국내로 복귀한 그는 이듬해 대구 팔공산에서 광산을 경영하면서 국내 애국 청년들을 선발해 중국 옌안으로 보내 독립군에 가담하게 했다. 그가 선발한 대표적인 애국청년으론 박영덕, 이상훈, 심재윤[1], 노석호, 김인 등을 들 수 있다. 1942년 중국으로 떠난 그는 국내와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자금을 모아 거사를 계획했다. 그의 동생 박진목은 훗날 형이 자신에게 해준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지금 일본이 가장 강하다고 자랑하는 관동군이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무적이라 자랑하던 일본 연합 함대는 전멸상태에 놓여 있으며, 지금 그들이 날뛰고 있는 것은 하나의 허세에 불과하고 인적 물적 자원이 도저히 이 전쟁을 감당해 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풀어 설명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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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민족은 국내외 모든 독립 운동세력이 협력해야 되고 국권은 봉기해야 됨을 교육적으로 알려주었다. (중략) 운동이 연합국의 인정을 받아야 됨도 말씀하셨다. 3.1운동 몇 갑절되는 군중 운동이 있어야 되고, 노인은 일본 놈 신사에 불을 지르고 학생은 왜놈이 우리 강토에서 견디지 못하도록 하여야 되고, 해외에서 독립 운동하는 여러 계열은 합세하여 연합전선적인 정부 형태를 형성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해야 됨을 말씀하였다.
박진목, <내 조국, 내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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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민족은 국내외 모든 독립 운동세력이 협력해야 되고 국권은 봉기해야 됨을 교육적으로 알려주었다. (중략) 운동이 연합국의 인정을 받아야 됨도 말씀하셨다. 3.1운동 몇 갑절되는 군중 운동이 있어야 되고, 노인은 일본 놈 신사에 불을 지르고 학생은 왜놈이 우리 강토에서 견디지 못하도록 하여야 되고, 해외에서 독립 운동하는 여러 계열은 합세하여 연합전선적인 정부 형태를 형성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해야 됨을 말씀하였다.
박진목, <내 조국, 내 산하>
박시목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또 그는 김시현 등과 함께 만주와 중국에 산재해 있는 독립군을 연합하려 노력했으며, 조선의용군, 임시정부, 미주 독립단체를 연결해 단일 독립운동 전선을 만들고자 했다. 또한 그는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등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1943년 일제 경찰에게 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아들 박희규 및 동지 10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2] 그 후 베이징 형무소에서 일제 형사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은 끝에 안타깝게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앞두고 아들과 함께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박시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