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박수덕(朴壽德) |
출생 | 1923년 9월 21일 |
평안남도
평양부 암정 44번지 (現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
|
사망 | 1982년 2월 15일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서울시립강남병원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3기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8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국광복군 출신의 군인. 이명은 박수덕(朴壽德).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3년 9월 21일 평안남도 평양부 암정 44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에서 태어났다.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에 입학해 재학 중이던 1944년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 뒤 강소성 서주시(徐州市)의 일본군 병영에서 훈련 받던 중 4월 장준하, 김준엽, 윤경빈 등과 탈출하였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한광반을 수료했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 부관에 임명되어 광복군 부위로 복무했고, 해방 직전에는 경위대 장교로 근무했다.
해방 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실의에 빠져 한동안 술과 여자에 빠졌었다. 당시 백범 김구의 주례로 결혼한 부인이 있었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있는 것을 목격하고 권총으로 자결하였고 백범이 비서 김우전을 시켜 시신을 수습하게 했다. [1]
그 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경비사관학교 3기로 임관하였다. 1958년 헌병학교장, 1961년 헌병 차감(육군 대령)을 역임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헌병차감으로 쿠데타 진압에 나섰고,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협조 요구에 "일제 만군 출신의 쿠데타에 독립군 출신이 어찌 협조할 수 있겠냐"며 거절하고 박정희 휘하 군대의 서울 진입을 저지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장도영 전 육군참모총장의 내란음모사건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한강아파트 자택에서 평범하게 지내다가 1982년 2월 15일 강남구 삼성동 서울시립강남병원에서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남양주군 화도면(現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가, 1995년 5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3.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광복군 김문택 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