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朴淳(? ~ 1402년( 태종 2년))
여말선초의 무장. 본관은 음성(陰城).
2. 생애
고려에서 도평의사사 지인을 지내 이성계가 1388년 위화도 회군 직전, 회군 승인을 받아오라며 우왕에게 보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상장군에 올랐다.상장군과 대장군이 일을 서로 바꿀 때 사시 3각에 임금에게 감사하며 작별을 청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졌는데, 그 뒤로 그대로 준수하지 못했다. 그래서 도평의사사에서 교지를 통해 병조에게 예전대로 하도록 했고, 예전에 김효공이 병조 정랑일 때 법대로 하지 않고 삼군부에 공문을 보냈다. 1399년에 박순은 수령관이면서 좌군장군을 지내면서 저 법대로 행해야 한다고 했다가 유습, 윤곤, 권진, 박습 등으로부터 거짓으로 교지를 전했다고 탄핵되었으나, 정종은 사헌 잡단 김효공을 파직시키고 사헌부에게 삼군부를 살펴보도록 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간이 패하고 유배를 갈 때, 태종의 명으로 이방간 부자를 익주에 옮겨 안치했다. 1401년 음력 1월 27일에는 사헌 중승이 되었고 변남룡이 이양우, 이천우, 이숙이 태상왕을 끼고자 한다는 무고죄가 있었는데, 2월 10일에 재판을 졸속으로 처리했다고 해서 사헌부의 여러 관리들과 함께 파면되었다.
음력 6월 25일에 사은서로 갔던 안윤시, 이현이 명나라의 장근, 단목예와 함께 조선으로 오면서 본래는 조준이 맞이하려 했으나, 조준이 병이 있어서 대신 이서를 보낸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박순은 평양으로 파견되어 단목예에게 조준을 대신해 이서가 오는 것을 설명했다.
음력 7월 19일에는 조회를 받기에는 궁궐과 무일전이 비좁다고 해서 민제가 태종에게 왕흥의 집을 사서 바치자 태종이 주변의 집을 사면서 명을 받아 신극례와 함께 궁궐과 무일전을 헐고 고쳤으며, 음력 7월 21일에는 벼슬을 얻기 위해 이무의 집에 드나들었다고 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궁궐의 조성을 감독하게 되었다. 이후 상호군을 지냈다.
1402년 음력 9월 19일 태종의 종기 치료를 위한 온천 행차를 사헌부에서 반대했다. 온천을 갔다가 사냥도 할 우려가 있어서 반대한 것도 있기에 태종은 해주로 행선지를 바꿨지만 박순은 해주가 개간한 곳이 많아 가서 사냥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음력 11월 8일, 태종에게 쫓겨난 신덕왕후의 친척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무마하고자 함주로 파견되어 도순문사 박만(朴蔓) 등을 설득하려다가 살해되었다. 난이 진압된 후 2등공신이 되어 유족들에게 토지 40결과 노비 4구가 하사되었으며 이후 태종이 주기적으로 박순의 처 임씨에게 곡식을 하사해주었다.
조사의의 난을 모티브로 한 함흥차사 전설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들 태종 이방원이 보내는 차사들을 오는 족족 죽여버리던 이성계도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 박순을 죽이기가 꺼려져,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박순이 강을 건넜으면 더 이상 쫓지 말라고 명을 내렸는데, 박순은 마침 병에 걸려 강을 건너지 못했던 터라 그대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조사의에게 죽었고 이는 이성계의 함흥 도착 전이었다.
3. 대중매체
대중매체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등장, 배우는 반문섭. 여말선초 위화도 회군 때부터 함께 해왔으며, 이성계의 이야기로는 다른 장수들과 매한가지로 왜구와 여진 등을 격퇴하고 다닌 뛰어난 장수로 언급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점에서부터 정치적 문제와 조선의 내부 개혁에 치중된 시점부터는 잘 등장하지 않다가, 이방원과 이성계의 대립이 극해져서 함흥차사의 문제가 발생할 때, 충의로 간 신하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자 충의와 조선의 충성 그리고 이성계의 동료로서 그에게 간다.야사와 실록을 적절하게 섞은 만큼 함흥차사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관복을 벗고 소를 데리고 가서 다른 장수들을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고 동시에 친구이자 자신의 상관을 만나러 가고자라는 의미로 와서 이성계에게 다가가서 미물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은연히 드러나게 만들고 자식을 용서해주길 빌며 엎드려서 부탁했고, 이성계를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살려서 돌려보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사의가 이를 반드시 죽여야한다고 주장하자,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쫓아가고, 박순이 강을 건넜다면, 살려주시고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죽이라는 말을 했다. 이성계는 조사의를 완전히 저지하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말했고, 그와 동시에 강까지 멀지 않으니 필히 건넜으리라 여겨 최대한 늦춰준 것이었지만, 야사와 마찬가지로 늦은 밤 일찍 출발했지만, 곽란으로 인해서 나루터 근처에서 쓰러졌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공이 다음날 아침까지 재워주고 미음까지 챙겨주며 그를 보내는 바람에 그는 그만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만다.[1] 그리고 죽기 전에 태종에게 절을 한 이후 베이면서 사망하게 된다.[2] 전승에 따르면 막 배에 타려는 순간에 죽었기 때문에 허리가 잘려서 토막이 났다는 흠좀무한 버전도 있다. 내레이션에서는 갑자기 배탈이 나서 해결하고 가느라 배를 늦게 타서 죽었다고 나온다.
이후 죽음은 장원심이라는 노승에 의해서 하륜에게 들어가게 되고 다른 이들 역시 다른 쪽으로 알게 된다. 이성계 역시 그에 대해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한탄하면서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의 죽음이 마냥 헛된 것이 아니었던지 조사의의 난이 벌어진 이후에도 이성계는 마음이 밝지 않고 한켠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움직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무학대사까지 나서서 " 지금의 성상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으니 그만 노여움을 푸십시오." 라며 설득하자 태조는 여전히 꺼림칙했지만 죄없는 차사들을 여럿 죽이고 박순까지 죽이고 보니 많이 후회된다며 못이기는 척 한양으로 향했고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이 바깥까지 튀어나와 눈물로 참회하자 마침내 옥새를 넘겨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