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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박대득(朴大得) |
출생 | 1908년 7월 11일 |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칠성리 (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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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1년 7월 2일 |
경상북도 대구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9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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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득룡은 1908년 7월 11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칠성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그는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동창생 윤장혁(尹章赫)·손익기(孫益基)·백대윤(白大潤) 등과 함께 대구부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던 백대윤의 집에서 신우동맹(新友同盟)을 조직했다. 신우동맹은 맹원(盟員)을 3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박득룡은 조은석이 이끄는 제2그룹에 속했다. 그들은 각 그룹별로 사회과학을 연구하기로 하고 또 대구부내에 있는 각 중등학교의 남녀학생들에게 주의를 선전할 목적으로 각 학교별로 선전위원(宣傳委員)을 뒀다. 이후 박득룡, 윤장혁 등은 신우동맹을 해체시키고 다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1927년부터 1928년 까지 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 등으로 조직의 명칭을 변경하며 활동했다.
1928년 9월 26일, 그가 다니던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교(同盟休校)가 일어났으나, 학생들의 불참으로 실패했다. 이에 박득룡은 동급학생들과 함께 제2차 동맹휴교를 계획하고 10월 15일 동맹휴교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 일로 11월 6일 동지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9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던 중 옥중에서 장진홍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감방의 문짝 등 형무소 기물을 파괴하고 가혹한 고문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다가 징역 8개월을 가형받았다.
출옥 후 대구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1년 7월 2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박득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 10월 17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