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노일(朴魯一) |
생몰 | 1923년 8월 15일 ~ 1976년 3월 15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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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1923년 8월 15일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대성고등학교에 재학했다가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하자 학업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측량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1942년 11월에 베이징으로 이주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작요원이었던 조병걸(趙炳傑)의 휘하에 들어가 지하공작 활동을 수행한 뒤 1944년 7월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다.이후 1944년 12월에 카이펑 지구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고, 1945년 5월 총사령부 연락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미합동작전협정에 의거해 포로심사관에 임명되어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또한 1945년 7월엔 구대본부 체육교관을 겸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거주하던 박노일은 1974년 일본 총리가 한일병합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일본 중의원에서 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대자보를 붙이고 일장기를 찢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가 서울 종로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이후 석방된 그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가를 불렀지만, 독립군가 가사를 끝까지 외워부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자 충격을 받고 즉석에서 <독립군가 보존회>를 결성해 1974년 문공부에 등록을 마치고 정식 출범시켰다. 그 후 독립군가 보존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1976년 3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노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박노일의 아내 곽영숙 여사는 남편이 사망한 뒤 독립군가 수집을 지속하여 1982년 항일 민족의 노래 96곡, 독립군가 97곡 등 192곡과 42편의 독립지사 어록을 모아 <광복의 메아리>를 출간했다. 또 1988년에 <용진가> 등 15곡을 테이프에 담아 전국에 보급하기도 했다. 그녀는 독립군가를 배포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지만 사회의 냉대에 서운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녀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유지를 끝까지 잇겠다는 뜻을 밝혔다. #
"독립군가가 음악적으로는 단순한 것들이지만 독립지사들이 희망·비분·절망을 담아 불러온 우리 민족의 숨길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반응이 냉담하고 우리 보존회(회장 장호암) 관계자들 외에는 아무도 이 사업을 안하려 해도 제가 해야할 일 같아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