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미겔 앙헬 라우리 (Miguel Ángel Lauri) |
생년월일 | 1908년 8월 29일 |
사망년월일 | 1994년 9월 26일 (향년 86세) |
국적 | 아르헨티나 | 프랑스 |
출신지 | 사라테 |
포지션 | 하프백, 포워드 |
신체조건 | 177cm |
소속팀 |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1928-1936) FC 소쇼몽벨리아르 (1936-1939) CA 페냐롤 (1939-1940) |
국가대표 |
10경기 / 1골 (
아르헨티나 / 1928-1935) 1경기 / 0골 ( 프랑스 / 1937) |
감독 |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1955) |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라우리의 성인팀 데뷔는 1928년에 이뤄졌는데 이 때는 아직 아르헨티나 축구계가 프로화되기 전이었다.1930년대 초반, 프로화의 물결을 타고 라우리는 에스투디안테스의 공격수들을 보좌했다. 이 당시 에스투디안테스의 공격수들은 마누엘 페레이라, 엔리케 과이타, 알레한드로 스코펠리 등이 있어서 교수진(Los Professores)이라는 별명으로 팀 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으로 불린다.
1931년에는 CA 보카 주니어스가 라우리에게 12,000페소로 이적을 제의했지만 에스투디안테스가 거절했고 라우리의 에스투디안테스 커리어 중 최고 성적은 1930년의 준우승이었다. 1936년, 라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할아버지의 나라 프랑스로 떠났고 FC 소쇼몽벨리아르로 이적했다. 그 곳에서 라우리는 디비지옹 1 1937-38 시즌 우승 멤버가 되었지만 심각한 부상으로 단 한게임밖에 뛰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우리는 다시 남미로 건너와 우루과이의 CA 페냐롤에서 선수 경력을 매듭지었다.
2.1.2. 국가대표
라우리의 국가대표팀 데뷔전은 1929년 9월 20일의 우루과이전이었다. 하지만 파르케 센트랄 원정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에 1대2로 패했다.이후 라우리는 193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 칠레를 상대로 대표팀 경력상 유일한 득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에 최종전에서 0대3으로 패배, 준우승에 머물렀다.
라우리는 프랑스 디비지옹 1에서 뛰던 시절, 레블뢰 소속으로 한 경기를 뛰기도 했다.
2.2. 이후
선수 생활을 마치고 라우리는 시간당 45센트를 받으며 발렌틴 알시나(Valentin Alsina)의 냉동 창고에서 일했다. 나중에 그는 스포르트 알시나의 기술 이사로 일하기도 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력한 오른발 슈팅 능력으로 황금 화살(Flecha de Oro)이라는 별명을 얻었다.4. 뒷이야기
- 라우리는 프랑스계 아르헨티나인이다. 그래서 라우리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표기하면 미셸 로리(Michel Lauri)이며 이 이름은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썼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별명처럼 쓰였다. 원래 성은 라로이(Larroi)였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표기가 틀리면서 라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 1933년, 라우리는 축구, 탱고, 영화에 푹 빠진 가족을 그린 코미디 영화 "Los tres berretines"에 출연했다.
- 라우리의 조카의 아들은 테니스 선수 가스톤 말라칼사(Gaston Malacalza)이다.
5. 수상
5.1. 클럽
- 디비지옹 1 우승 1회: 1937-38( FC 소쇼몽벨리아르)
-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 1936-37(FC 소쇼몽벨리아르)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0(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 디비지옹 1 준우승 1회: 1936-37(FC 소쇼몽벨리아르)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9( CA 페냐롤)
5.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5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