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지기(知期) |
본관 | 남평 문씨 |
출생 | 1892년 11월 30일 |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내천방 신양동 (현 평양시 중구역 신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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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년 10월 23일[1]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0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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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명훤은 1892년 11월 30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내천방 신양동(현 평양시 중구역 신양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 방략을 모색했지만 병을 얻어 귀국했고, 1917년 4월 당시 평안남도 순천군 밀전면· 맹산군 봉인면에서 도합 7만 438평의 구리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다. #
그러다 1919년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한 후 펑톈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영어전문학교를 수료하고 1920년 4월 1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그해 6월 24일 사직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서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 초 조선에 돌아온 문명훤은 상업에 종사하면서 흥사단의 국내 조직체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회원 15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4년간 미결수 상태로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40년 8월 21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공소했고, 1941년 11월 17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많은 수양동우회 동지들이 전향성명을 발표하고 친일 행적을 보였지만, 그는 이에 가담하지 않고 은거하다가 8.15 광복 후 서울로 이주했고, 1953년 10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문명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당초 망우역사문화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11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0월 25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