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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아키라무라 이코우(明村以恒) |
출생 | 1884년 2월 10일 |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소림방 원등리 (현 평안북도 영변군 남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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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6년 5월 4일 |
평안북도 영변군 | |
종교 | 개신교 ( 북감리파[1])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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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명이항은 1884년 2월 10일 평안도 영변대도호부 소림방 원등리(현 평안북도 영변군 남등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07년 초에 결성된 신민회에 가담해 영변군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1909년에는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했다. 1909년 12월 16일 영변군 읍내면 유신학교(維新學校)에서 교장 한동설(韓東卨)[2]과 함께 학생들에게 ' 일진회 회원들은 매국노'라는 설명을 하면서, 교내에 일진회원으로서 일본어교원으로 있던 최이섭(崔利涉)에 대해서 '일진회원과 같은 매국노는 교원이 될 수 없다'며 학생들의 찬성을 얻어내 쫓아내고 일진회와 관련있는 학생들은 회원증을 불태워버리지 않으면 등교를 할 수 없게 막기도 했다 #.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그해 8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연통제가 실시되자, 그는 1920년에 연통제 영변군 참사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을 맡았다. 그러다가 사이토 마코토 당시 조선총독에게 독립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 신의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개월 25일을 선고받았다.
1922년 105인 사건 이후 폐교가 된 오성학교를 재건했으며, 그해 11월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 기성준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어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오산학교를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킨 뒤 오산학교의 이사가 되어 한민족을 이끌 새 인재를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26년 7월 8일에는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박해가 갈수록 거세지자 은둔했다. 1938년 12월 3일 재단법인 영변숭덕학원(崇德學園) 이사에 취임했고, 1940년 7월 30일 아키라무라 이코우(明村以恒)으로 창씨개명했다. #
8.15 광복 직후인 1946년 5월 4일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명이항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