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메리 조 코페크니 Mary Jo Kopech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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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메리 조 코페크니 Mary Jo Kopechne[1] |
출생 | 1940년 7월 26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 | |
사망 | 1969년 7월 18일 (향년 28세) |
미국 매사추세츠주 채퍼퀴딕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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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비서. 민주당 보좌관이였으며 차파퀴딕 사건의 사망자이다.국내에서는 '코페친'이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많은데, 발음 기호에 가까운 표기는 '코페크니'가 맞다. 간혹 '코펙니'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있다.
2. 생애
펜실베이아 윌크스배리에서 태어났고, 유아 시절 가족이 뉴저지 버클리 하이츠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보험 영업사원이며, 폴란드계 이민자 후손이며, 양친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2] 메리 조는 외동딸이었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부모의 영향으로 메리 조는 가톨릭 신자로 자랐고, 가톨릭 교구 학교를 다녔다.고교 시절 가톨릭계 남녀 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장래 희망으로 수녀를 진지하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수녀가 되길 포기하고 1959년 뉴저지의 콜드웰 여자대학(Caldwell College for Women)의 경영 비서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인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의 취임 연설에 감명되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2년제 경영 비서 전문학사 과정을 마친 후 학교에 남아 4년 학사 학위를 취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많은 정치, 역사 과목을 수강하였다고 한다.
1962년 경영학사를 취득하며 대학을 졸업 후 그녀는 몽고메리의 가톨릭 재단에서 진행한 민권 프로젝트에서 일하면서 가톨릭계 학교에서 흑인 학생들에게 타자 등 실용 기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년 후인 1963년그녀는 정치인의 비서가 되기 위해 수도 워싱턴 DC로 이주하였고, 당시 민주당의 중진이었던 조지 스매더스 상원의원의 비서가 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개월 후 스매더스의 정치적 라이벌인 로버트 케네디의 비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스매더스가 직접 로버트 케네디에게 그녀를 추천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녀가 너무나 열성적인 케네디 가문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3]
이후 로버트 케네디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비서로 활동했다. 특히 1968년 로버트 케네디의 대선 경선 당시, 그녀를 포함한 6~9명의 젊은 여성으로 구성된 로버트 케네디의 비서 그룹은 보일러룸 걸스(Boiler Room Girls)라 불리었다. 보일러룸 걸스 모두 20대의 미혼 여성이었다. 그녀들의 업무 공간에는 창문이 없었다고 한다. 메리 조는 보일러룸 걸스 멤버들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로버트 케네디와 일해왔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훗날 보일러룸 걸스는 6명으로 알려졌는데, 차파퀴딕 사건의 파티에 초대된 인원이 6명이었고, 1968년 로버트 케네디 대선 당시 함께 창문 없는 방에서 일했던 인원은 최대 8~9명이었다고 한다.
1968년 6월 6일 로버트 케네디 사망 이후 여러 정치 캠프와 정치 컨설팅 회사 등을 전전했으나 자주 이직을 반복했다.
1969년 7월 18일 테드 케네디가 형 로버트 케네디의 비서 그룹이었던 보일러룸 걸스 6인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 참석한 메리 조는 1969년 7월 18일 밤에서 19일 새벽 사이,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차에 동승한 채로 물에 빠져 사망했다. 사고 차량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수습한 소방구조대원에 따르면 사후경직된 그녀의 시신은 뒷잡석을 붙잡고 얼굴은 위를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이 발견된 위치와 자세를 근거로 그녀가 에어 포켓에서 수십분간 생존해 있었으나 결국 질식하여 사망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