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 Mathieu de Foix-Comming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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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85년 ~ 1453년 12월 | |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푸아 백국 | |
아버지 |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 |
어머니 |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 | |
형제자매 | 장 1세, 가스통 1세, 아르샹보, 피에르 | |
배우자 |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 카트린 드 코아레이즈 | |
자녀 | 잔, 마르그리트, 장밥티스트 드 푸아( 사생아) | |
직위 | 코밍주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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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밍주 백작.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에 가담했다가 아르마냑파로 전향했다.2. 생애
1385년경 가스코뉴 공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로서 가스코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였고, 어머니는 카스텔봉 자작인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의 딸인 이자벨이었다. 형제로 장 1세 드 푸아,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아르샹보, 피에르[1]가 있었다.1413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측근이 되었다. 1419년, 샤를 6세는 용맹공 장을 살해하는 데 관여한 기욤 2세 드 나르본의 영지를 몰수하고 그에게 넘겼다. 같은 해, 그는 자신보다 20세 연상인 코밍주 여백작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와 결혼했다. 몇달 후 마르그리트를 성채에 감금해놓고 혼자서 모밍주 백국을 통치했다. 1425년 1월 6일에 샤를 7세로부터 사면서를 받고 형 장 1세와 함께 아르마냑파에 가담했으며, 1428년까지 도피네 총독을 역임했다.
1436년 형 장 1세가 사망한 뒤 조카인 가스통 4세 드 푸아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1439년 푸아 백국을 침략한 용병대장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에게 재물을 바치고 물러나게 했다. 이 무렵, 마르그리트를 추종하는 귀족들이 20년간 성채에 마르그리트를 감금한 그에게 반감을 품고 샤를 7세에게 호소했다. 샤를 7세는 그에게 마르그리트를 석방하고 코밍주 백국 통치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했다. 1440년,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설립한 황금 양모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41년, 샤를 7세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4세 다르마냐크에게 왕명을 어긴 푸아 백국을 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그는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드 푸아와 함께 저항했지만, 곧 왕실에 척지는 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20여 년간 성채에 감금되었던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를 석방하고 기옌에 대한 군사 작전에 동참하는 조건으로 푸아 백국과의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마르그리트는 1443년 3월 9일에 석방되었지만 그해 여름에 사망했고, 코밍주 백국은 왕실에 귀속되었다. 1449년, 마티외는 가스통 4세의 몰레옹 포위에 가담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453년 12월에 사망했다.
3. 가족
- 마르그리트 드 코밍주(1365 ~ 1443): 코밍주 백작 피에르 레이몽 2세 드 코밍주의 딸, 코밍주 여백작. 마티외와 결혼하기 전에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 장 드 페장사게와 결혼했다. 코밍주 백국의 통치를 독차지하려는 마티외에 의해 20여 년간 감금되었다.
- 카트린 드 코아레이즈: 아스펙 남작 레이몽 아르노 드 코레이즈의 딸.
- 잔: 카라만 자작, 생펠릭스 남작 장 2세의 부인.
- 마르그리트: 세프부통의 영주 앙투안 드 보네발의 부인.
- 사생아
- 장밥티스트 드 푸아: 닥스와 코밍주 주교. 1498년에 합법적인 자녀가 되었다.
[1]
1386 ~ 1464, 아를의 대주교이자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