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에다 미츠요([ruby(前田 光世, ruby=まえだ みつよ)]) Mitsuyo Maeda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1878~1914)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1915~1941) |
생몰년도 |
1878년
11월 18일,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 1941년 12월 28일 |
종목 | 유도 |
신체 | 164cm |
학력 | 와세다대학 중퇴 |
별명 | 콘데 코마(Conde Koma) |
1. 개요
일본 前 유도가 출신의 前 브라질 무도가이며, 유도 7단이었다. 원래 이름은 마에다 히데요였는데, 유도를 만든 도장인 강도관에 입문한 후 이름을 마에다 미츠요로 개명했다. 격투기 매니아라면 알만한 브라질리언 주짓수의 창시자 중 한명인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스승이었다.[1]일본 출신의 신격화된 무도가들 중 실전에서 가장 강했던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무려 2000번이나 싸워 이긴 스트리트 파이터였는데, 이런 류의 무용담이 으레 그렇듯 당연히 뻥도 좀 섞였다. 실제론 유럽에서 레슬링 룰로 싸워 진 적이 몇 번 있다. 나머지 커리어도 모이헤리 지고로 같은 다른 일본 무도가들처럼 이름 없는 선수들과 쌓아올리면서 만든 게 많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무술가 중에서 이렇게 싸우고 돌아다닌건 마에다 미츠요와 최영의 정도뿐이고 세계적으로 봐도 그다지 없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철저한 실전을 추구한 사람이긴 했다.
2. 생애
아오모리 현에서 태어나 1895년에 아오모리현 제일 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도쿄로 상경하여 와세다 중학교(현재는 와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스모 선수였고 그도 10대 시절 스모를 수련했지만, 작은 체격을 이유로 그만두었다. 야구 선수 생활도 했었다고 한다.스모 선수를 관뒀을 때 즈음, 그 당시 유도가 어전 유술 대회에서 고류 유술을 그야말로 박살내는 것에 감동하여 유도에 흥미를 느꼈는데, 때마침 도쿄 전문 학교(현재는 와세다대학)에 유도장이 생겼고 곧장 유도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다 1897년 6월에 강도관에 입관하게 된다.
그는 입단할 때 관장인 가노 지고로에 의해 특별히 지명되어, 강도관의 4천왕 중에서 최단신이었던 토미타 츠네지로를 스승으로 삼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은 키 때문이었다. 가노 지고로는 유도에서 중요한 건 신장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2] 아무래도 마에다 미츠요의 재능이 심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초단 심사를 받을 때는 가노 지고로에 의해 그만 특별히 15인 연속 대련을 명받고 훌륭히 달성한다. 게다가 현재의 브라질리안 주짓수 정도로 승급이 힘들었던 당시의 유도 승급 체계에서 7년도 안돼 4단을 땄다는 건 그가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족으로, 웬만한 서구권 유도 체계의 경우 승급하기가 여전히 주짓수 만큼이나 힘든데, 웬만해서는 5년 정도를 투자해야 초단을 겨우 받으며, 2년 안에 초단을 단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재능이 있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그는 1904년, 유도 4단이던 시절 멀쩡히 잘 다니던 도쿄 전문 학교(현재의 와세다대학)을 관두고 그의 스승 토미타 츠네지로와 함께 유도 전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3] 그리고 웨스트 포인트에서 유도 시범을 보이게 되는데, 토미타 츠네지로가 그만 레슬링 베이스의 선수에게 지게 된다. 하지만 마에다 미츠요가 그 레슬러를 포함한 모든 도전자를 제압했다. 또 일본 제국에게 호의적이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에서 초청시합을 갖는데 그의 스승이 또 패배. 이에 미츠요는 유도의 강함을 알리겠다는 일념으로 스트리트 파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의 미국의 치안 상황은 19세기 중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야말로 고담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는 그런 고담 수준의 동네는 피해다녔다.[4] 그는 그 틈바구니에서 "나를 이기면 1000달러"라는 간판을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하니. 165cm도 안되는 남자가 그런 간판을 걸고 다녔으니 반응은 왠 미친놈이 있지라는 반응이였다. 하지만 그의 배짱도 보통을 넘어서 쫄지 않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그를 슬금슬금 피하게 되었다. 또 그는 실전 중심의 파이터여서 일정을 잡고 대련을 하는 것도 무척 싫어했다고. 말그대로 밥먹듯이 싸우러 나갔다고 한다.
이렇게 명성을 쌓아간 그는 미국의 스트리트 파이터계의 최강자 부처보이와의 일전을 갖게 된다. 부처보이는 당시 190cm의 괴력의 소유자였고, 시합이 정해지자 마에다 미츠요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당연한 예상인 게 아무리 유도의 강자라고 하더라도 25cm가 넘는 키와 체급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마에다 미츠요가 유리하게 경기를 풀어나갔으며 링위에서 레슬링룰로 진행된 시합에서 애초에 천부적 그래플러인 마에다 미츠요에게 부처보이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몇번이나 메쳐져서 멘탈이 무너진 부처보이는 결국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데, 내심 스트리트 파이트를 기대하고 있던 마에다 미츠요는 그를 플라잉 암바로 제압해 게임을 끝내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미국에 유도의 강함이 널리 전파되게 된다.
그는 전세계에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1908년에 스페인으로 건너가게 된다. 다만 여기서 레슬링 룰 때문에 패배한 전적이 있어지만 곧바로 훌훌 털고 그 이후 연전연승은 계속됐고, 스페인에서도 그의 명성은 계속되게 된다. 처음에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코마루는 일본어로 '곤란해' 혹은 '곤궁해'라는 뜻. 돈이 생기면 규모없이 막 써버리는 그의 경제관념 때문에 그는 돈이 떨어지면 말버릇처럼 '코마루.. 코마루..'하였고 주위 스페인 사람들이 그에게 코마루라고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그가 '곤란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 없었고 그래서 별명을 '코마'로 바꾼다. 이후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그의 모습에 감명받은 스페인 사람들은 그에게 '백작'이라는 작위를 붙여 그를 '콘데 코마'라고 부르게 된다.
세계를 유랑하던 그는 1915년에 브라질에 유술장을 차리고 정착하게 된다. 아마도 브라질에서는 유술에서 유도라는 생소한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이름으로 강도관 유도를 가르쳤는데, 그 이유는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가 타류 유파와의 프로 시합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고 이를 어긴 마에다 미츠요가 스스로 강도관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유도라는 이름 대신 유술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란 설이 있고, 또 다른 설로는 이미 서구에 '유도'가 '유술' 즉 '주주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기에(유도는 이후 퍼진 단어이므로) 굳이 유도를 쓸 것 없이 이미 알려진 유술로 홍보했단 설도 있다.
하여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마에다 미츠요는 고류 유술을 가르쳤다고 오해하는데, 그는 뼛속까지 유도 기반의 파이터였다. 다만 지금의 유도를 토대로 상상하면 안된다. 마에다 미츠요는 한발 더나가 실전 싸움을 통한 자기만의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예를 들자면 하단 태클) 그가 구사했던 유도는 지금의 유도보다는 오히려 MMA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브라질은 미국과는 달리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1927년 일본기업들은 토마사수라는 아마존 유역에 대규모 일본인 이민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이에 마에다도 중요 인물로 참여하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지 계획은 좌절되고 마에다는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만을 하게 된다.
그가 브라질에서 정착하면서 브라질의 유지들과 교분을 갖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스타우 그레이시였다. 가스타우 그레이시는 일본인 이주에 많은 도움을 줬고, 마에다 미츠요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싸움을 일삼던 카를로스 그레이시를 가르치게 된다. 이렇게 또 하나의 전설이 시작된다.
그는 그 이후에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말년을 브라질에서 보낸다. 항간에는 그가 일본에 돌아가지 못한 것은 강도관에서 파문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1940년에 일본 정부에 의해 초청을 받은 적도 있다. 그가 일본행을 택하지 않은 것은 아내와의 의리 때문이었다. 그는 44세에 두번째 아내를 얻게 되는데[5] 그 당시엔 그닥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었던 브라질 사람과 결혼한 일본인이 일본으로 귀환했다가 종적을 감춰버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허나 그는 병약한 아내를 사랑했고,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 일본행은 일생동안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브라질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사인은 신장 질환. 신장병이 생기게 된 건 열악한 브라질의 수질탓이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에 유도복을 가져오라고 한 뒤 "아오모리의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고 영면한다.
아오모리현 히로사키 공원에 있는 추모비 |
3. 기타
- 브라질에서 숨을 거뒀지만 그의 명성은 일본에도 자자했던 것 같다. 브라질에서 그레이시 가문의 엘리오 그레이시와 대전한 유도 천재 기무라 마사히코는 두 팔이 모두 부러질 때까지 끝까지 싸운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이 한마디를 남겼다. "과연 마에다 미츠요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엘리오의 투지야말로 일본 무사의 거울이다. 경기는 내가 이겼으나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는 패배했다."
- 권아의 그림 작가 후지와라 요시히데가 '콘데 코마'라는 제목으로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를 그렸다. 그런데 누가 권아 그림작가 아니랄까봐, 이 만화도 무술고증 관련해서 엄청난 혹평을 들었다. 가노 지고로 최강설이라거나, 강도관 승단과정이라거나. 특히 말이 많이 나왔던 것이 사이고 시로 관련이었는데, 산바람이라고 오역된 야마아라시[6]의 기술 묘사도 문제가 많았고, 마에다 미츠요가 야마아라시 기술을 이어받았다는 것도 근거가 전무하다. 본래 유도만화도 아니었다 갑자기 유도만화로 전향한 신 공태랑 나가신다 쪽 고증이 월등하게 정확할 정도다.[7]
- 수라의 문에서는 사이고 시로에게 무츠원명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뛰어난 강자의 자질이 있는 마에다 사부로를 양자로 맞이했다. 물론 당사자는 무츠원명류와 마주치지 못했고 손자인 켄신 마에다가 결국 마주쳤다. 손자는 후와원명류의 야마다와 마주치고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1]
다만 카를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그레이시 가문 형제들과는 딱히 연이 없다. 물론 카를로스가 맏형으로 나머지 동생들과 서로 연구하며 만들어낸게 오늘날 브라질리언 주짓수긴 하다.
[2]
토미타 츠네지로는 가노 지고로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받았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3]
러일전쟁당시 일본에게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해준
유니온 퍼시픽의 사장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이 유술에 관심있어 초청했다.
[4]
떼거리로 총, 칼, 연장을 들고 나온다고 생각해보자.
[5]
첫번째 아내는 사별했다.
[6]
山嵐, 산폭풍.
[7]
사이고 시로의 야마아라시가 그토록 강력한 필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특수한 신체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이고 시로는 발가락만으로 멱살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일반인보다 유독
발가락이 길고 강력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상대방의 도복 하의를 발로 잡아채 넘기는 것이 가능했다고. 당연히 마에다 미츠요는 그런 체질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 야마아라시가 가능할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