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마르쿠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 라틴어: Marcus Cluvius Ruf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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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가, 역사가.2. 행적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졌던 서기 41년 1월 24일 당일 칼리굴라가 팔라티노 황궁과 극장이 이어지는 비밀 통로에 들어섰을 때 원로원 의원이자 전직 프라에토르(Preetor: 군대 지휘관과 선출직 행정관에게 부여되는 칭호) 바타니우스와 '클루비우스'의 수상쩍은 밀담을 소개했다.원로원 의원 계급이자 전직 프라에토르인 바타니우스가 옆에 있던 전직
집정관 클루비우스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기에 두 사람 외엔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클루비우스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바티니우스가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클루비우스, 오늘은 폭군을 죽이는 연극이 공연될 걸세!"
"사랑하는 클루비우스, 오늘은 폭군을 죽이는 연극이 공연될 걸세!"
요세푸스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클루비우스를 전직 집정관이라고 칭했지만, 기원전 41년 이전 집정관들 중 클루비우스라는 인물의 존재는 파악되지 않았다. 또한 이 인물이 히스파니아 총독을 역임하고 훗날 역사서를 집필힌 클루비우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네로 통치 기간(54~68년) 동안, 그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수에토니우스는 65년 여름 전주곡을 연주한 네로가 전직 집정관 클루비우스 루푸스에게 이제 '니오베(Niobe)'를 연주한다는 것을 관중들에게 발표하라고 지시했다고 기술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67년 네로의 그리스 여행에서 루푸스가 네로의 예술 공연이 성공할 수 있도록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들러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고 밝혔다.
68년, 네로가 자살하고 갈바가 새 황제에 올랐다. 갈바는 황제가 되기 전에 총독을 맡았던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새 총독으로 그를 임명했다. 69년 1월 15일 갈바가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암살당하자, 그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휘하 군단들이 오토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가 라인 전선 방면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비텔리우스 지지로 선회했다.
한편, 북아프리카의 두 지방인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의 총독인 루체이우스 알비누스는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히스파니아로 진군하려 했다. 이에 루푸스는 제10 게미나 군단에게 히스파니아 남부 해안으로 행진해 군대가 곧 아프리카로 넘어가려는 인상을 비추게 했다. 이와 동시에 백부장을 마우레타니아로 파견해 그 지역의 무어인들을 비텔리우스 편으로 끌어들이고 루체이우스 알비누스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의 거듭된 충성 맹세 대상 변경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네 황제의 해로 로마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황제의 이름을 완전히 생략한 공식 문서를 작성한 조치가 문제를 일으켰다. 비텔리우스의 해방노예이자 측근인 힐라리우스는 그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히스파니아에서 군림하려 한다고 여기고, 루푸스의 연설문 일부 구절을 반역할 마음을 품었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루푸스는 재빨리 루그두눔(현재 리옹)을 막 떠나 이탈리아로 가고 있던 비텔리우스에게 달려가 충성심을 입증하려 했다. 비텔리우스는 이에 흡족하여 측근으로 삼고 힐라리우스를 처벌했다. 이후 루푸스는 비텔리우스의 곁에 있으면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관리를 부관에게 맡겼다.
비텔리우스가 몇 달 후 새로운 왕위 계승자인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패한 후에도, 루푸스는 지위를 유지했다. 타키투스는 가이우스 헬비디우스 프리스쿠스가 원로원 회의 때 루푸스가 네로와 친밀한 사이이며 네로의 악행을 열심히 도왔다고 규탄하는 연설을 소개했다. 많은 의원들이 이에 호응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루푸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그를 보호했다.
루푸스는 말년에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네로의 치세 동안 벌어진 사건을 다룬 역사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범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지만, 타키투스의 <연대기>와 <역사>,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 후대 역사가들의 주요 참고 사료로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