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 고시지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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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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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헌액자 | |
구스 고시지 | |
헌액 연도 | 2008년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투표 결과 | 85.8% (9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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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마이클 "구스" 고시지 Richard Michael "Goose" Goss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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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51년 7월 5일 ([age(1951-07-05)]세)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 |
신체 | 190cm / 81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70년 드래프트 9라운드 전체 204번 ( CHW) |
소속팀 |
시카고 화이트삭스 (1972~1976) 피츠버그 파이리츠 (1977) 뉴욕 양키스 (1978~198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984~1987) 시카고 컵스 (1988)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89) 뉴욕 양키스 (1989)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0) 텍사스 레인저스 (199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2~1993) 시애틀 매리너스 (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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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마무리 투수. 100마일을 넘어가는 패스트볼을 구사한 파이어볼러로 뉴욕 양키스의 1970년대 후반의 중흥기의 뒷문을 책임지며 통산 1000경기를 돌파한 투수가 되었다. 1이닝 마무리 이전의 시대에 뛰었던 선수로 2이닝 이상 던지면서 승리를 지킨 선수로 상대적으로 적은 세이브 개수에도 불구하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통산 성적은 124승 107패 310세이브 3.01 1,502탈삼진.
2. 선수 경력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지명을 받은 이후, 초기에는 불펜과 선발을 오가던 선수였지만, 1975년 마무리로 완전히 자리 잡아 세이브 1위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구원 투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피츠버그를 거쳐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후에는 오랜 암흑기를 끝내고 다시 도약한 양키스의 구원 투수로 활약하며 팀의 1978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양키스의 뒷문을 사수하면서 활약한 후에는 샌디에이고로 건너가 팀의 1984년 월드시리즈 첫 진출에도 이바지 했다. 양키스와 샌디에이고에서의 활약이 끝난 후에는 저니맨이 되어 이 팀 저 팀을 옮겨다녔다. 심지어 1990년에는 MLB 보다 아래로 평가 받던 일본프로야구 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뛰기도 했는데, 전성기는 한참 전에 떠나보낸 상태라 명성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2승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4.40) 위 항목 사진을 보면 뭔가 생김새 처럼 동양인 같이 보인다.최고의 활약은 역시 양키스 시절로 1978년 10승 11패 27세이브로 세이브 1위에 올랐고, 1980년에는 6승 2패 33세이브를 기록하며 사이 영 상투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양키스의 수호신으로 군림하며 짧았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양키스의 중흥기를 책임졌던 선수였다.
역사적인 순간을 매듭짓는 장면에도 많이 출현했는데, 1978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간의 원게임 플레이오프에서 버키 덴트의 역전 2점 홈런으로 잡은 리드를 지켜낸 선수가 고시지였다. 1984년 샌디에이고가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2패 후 내리 3연승을 하며 월드시리즈에 첫 진출할 때, 5차전 세이브를 따낸 것도 고시지였다. 피트 로즈의 마지막 타석에서 삼진으로 돌려 세운 것 역시 고시지. 놀란 라이언의 308승 때, 본인은 308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굴욕적인 장면에도 많이 출현하는데, 대표적으로 1980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에서 조지 브렛에게 얻어 맞은 홈런, 1984년 월드 시리즈 최종 5차전에서 커크 깁슨에게서 패전을 확정짓는 홈런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1]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은 조지 브렛 항목에 자세히 설명된 파인 타르 사건. 이 때 조지 브렛에게 홈런을 맞은 선수가 바로 구스 고시지다.
3. 플레이 스타일
98마일에서 102마일 사이의 패스트볼이 주무기인 파이어볼러로 , 시대 대비 압도적 최강의 구위를 자랑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종속을 측정하였으므로 초속 기준 100~104마일 정도[2]의 패스트볼을 던졌으리라 추정된다.간간히 변화구도 던졌지만, 그리 위력적이지는 않았고, 오로지 빠른 공을 앞세워서 정상급의 마무리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런 빠른 공을 던졌지만 몸쪽 위협구로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20년이 넘는 선수 생활 동안 위협구를 던진 경우는 딱 세 번 뿐이라고.
고시지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구속이 하락했는데, 그 하락한 구속이 종속 95마일이었으므로 마무리 역할 수행 시에는 별다른 구위 문제가 없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연도 | 득표율(%) |
2000 | 33.3 |
2001 | 44.3 |
2002 | 43.0 |
2003 | 42.1 |
2004 | 40.7 |
2005 | 55.2 |
2006 | 64.6 |
2007 | 71.2 |
2008 | 85.8 |
9수 끝에서야 들어간 것도 그렇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들 중에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 편. 일단 모자는 7년 뛴 양키스 모자를 쓰고 갔지만 일본까지 갔다 왔을 정도로 저니맨으로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보니 2차대전 이후 선수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명예의 전당 헌액자임에도 양키스에서 영구결번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 다른 선수로는 뉴욕 자이언츠 모자를 쓰고 간 호이트 윌헬름이 있고 둘 다 불펜투수에 저니맨이다.[3]
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구스 고시지 | 9 | 44 | 109 | 19 |
HOF 입성자 평균 | 40 | 185 | 100 | 50 |
- JAWS - Relief Pitcher (4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구스 고시지 | 42.0 | 32.0 | 37.0 |
릴리프 HOF 입성자 평균 | 40.6 | 28.2 | 34.4 |
5. 연도별 성적
[1]
이 경기에서 파드리스 감독이 마운드에 올라와 "깁슨을 거르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만, 굳이 "아뇨. 정면승부 하겠습니다"고 고집하다가 홈런을 맞아서 더욱 애처로운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2]
아롤디스 채프먼 커리어 초기, 현 시대의 조던 힉스나 조안 두란 정도의 구속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고시지는 이걸 1970-80년대에 던졌으며 부상도 잘 안 당했기에 역대 파이어볼러 중에서도 손에 꼽는다.
[3]
블라디미르 게레로도 아직은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지만
LA 에인절스의
마이크 트라웃이 쓰고 있는 등번호이기에 트라웃이 은퇴하고 공동 영구결번을 시킬지, 트라웃이 번호를 바꾸면 그 즉시 영구결번을 시킬지 찬반여론이 갈리는 중이다. 그렇다고 영구결번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