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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05년 12월 23일에 함경북도 경성군 매향리에서 태어났다.1928년 공청에 가입, 녕안현에서 지하정치공작원으로 일하는 등 여러 반일 지하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여름, 훈춘현 농민협회 책임자로 임명되어 추수투쟁을 지휘했으며 1932년에 항일 빨치산에 가입하여 소대장, 중대장, 중대 정치지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9년에 왼쪽 팔에 부상을 입어 팔을 절단했고, 1940년 5월, 소련으로 넘어갔으며 부상 때문에 88여단엔 들어가지 않고 원동정치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양로원과 벽돌공장에서 일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 녕안현 서기, 조직지도원, 녕안현 역사박물관 관장을 지내는 등 중국에서 지내다가 1960년 12월에야 귀국하여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4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63년 4월, 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 4월, 검사총장 박세창이 주중 북한 대사로 임명됨에 따라 5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후임 최고검찰소 검사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66년 9월 30일, 김익선이 국가검열상으로 이임함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후임 최고재판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여기에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을 겸하였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다시 비서제가 실시된 이후 1967년 6월, 숙청된 김도만의 후임으로 비서국 선전선동비서 겸 당 부장으로 일했다. 1967년 12월, 대의원자격심사위원장을 지냈으며 최고인민회의 4기 대의원에 선출, 상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초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9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0년 1월, 중앙력사박물관 관장에 임명되었으나 5차 당대회 직전인 1970년 10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및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1978년 8월 10일에 조용히 사망,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투사 직함으로 부인 장학숙과 함께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조선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