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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17:56:03

류상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류상준
柳相駿[1]으로 등재되어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덕연(德然) / 금재(錦齋)
본관 문화 류씨[2]
출생 1890년 2월 2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검사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3][4]
사망 1951년 2월 20일[5]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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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0년 2월 2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동촌면 검사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서 아버지 류원하(柳元河, 1869. 8. 23 ~ 1959. 1. 3)와 어머니 남양 홍씨(1868. 1. 2 ~ 1938. 3. 8)[6]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뒤 고향 인근의 달성군 해안면 동촌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차경석을 교조로 결성된 보천교에 포섭되어 1920년 음력 8월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 유근성의 집에서 '치성비'로 15원을 납부하고 12인조에 가입했다. 그 뒤 그는 보천교의 힘으로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며 선전하고 자금 모집 및 교세 확대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20년 음력 9월 고향 마을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벌여 치성비로 돈 100원을 모금했고, 이를 이듬해인 1921년 음력 1월 말 동지 유근성에게 납부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1921년 6월 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 이송되었다가, 6월 1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 받았다.

그러나 곧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1년 7월 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이 본형에 산입되었을 뿐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 뒤 상고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51년 2월 20일 별세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1] 1921년 6월 13일 형사사건부에는 柳 [2] 곤산군파(崑山君派) 35세 상(相) 항렬. 족보명은 류상용(柳相湧). [3] 인근의 방촌동과 함께 문화 류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유근성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류상준의 출생지인 검사동 650번지는 현재는 없는 지번으로, 대구 공군기지 부지에 편입되어 있다. [5] 문화류씨세보 권8 147쪽에는 1952년 1월 1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6] 홍익원(洪益遠)의 딸이다.